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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기록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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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기념비와 비각. |
우리 역사에는 때를 잘못 타고나 불운한 일생을 보낸 아까운 인재도 많았지만, 하늘이 때를 맞춰 내려준 영웅호걸도 많았으니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서희(徐熙)와 강감찬(姜邯贊), 그리고 조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한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문신이면서 기지·용맹 타고나
권율은 문신이면서도 타고난 장수감이었다. 그는 과감한 성격에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기지와 용맹을 두루 갖춘 천부적 장재(將材)였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뒤늦게 벼슬길에 나아가 당시 광주목사로 있던 권율은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북상하다가 금산 이치(梨峙)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는 왜군을 물리쳐 호남이 유린당하는 것을 막았다.
다시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상해 수원 독성(禿城)을 굳게 지키며 포위 공격하던 왜군과 맞서 싸웠다.
또한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2월 12일 행주산성에서 불과 2300명의 군사로 무려 14배에 이르는 3만여 왜적 대군을 물리치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유명한 행주대첩이다. 권율은 그해 6월 조선 육군과 수군을 총지휘하는 도원수가 돼 영남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했다는 죄 아닌 죄로 해직됐으나 곧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됐다. 그 뒤 호조판서와 충청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명나라 제독 마귀(痲貴)와 합세해 울산의 왜군을 치기도 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전국의 전쟁터를 누비며 목숨을 걸고 싸운 권율은 왜란이 끝난 뒤 전후 처리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63세로 세상을 떴다.
권율은 중종 32년(1537) 12월 28일에 강화도 연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는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과 조씨부인(曺氏夫人)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재상가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남들에게 귀한 집 자식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글공부에만 죽어라고 매달린 책벌레도 아니었다.
젊어서 윤근수(尹根壽)와 더불어 이덕수(李德秀)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고, 17세 때인 명종 8년(1553)에 조휘원의 딸과 혼인해 딸 하나를 뒀다. 이 딸은 뒤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시집갔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오성 대감’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해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판서를 다섯 차례나 역임했고, 난이 끝난 뒤에는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런데 권율은 첫 부인이 딸 하나만 낳고 일찍 죽자 29세 때인 명종 19년(1564)에 현감을 지낸 박세형의 딸과 재혼했다. 하지만 박씨 부인에게서는 소생이 없었다.
권율은 나이 20이 넘도록 과거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산수 간에서 풍류를 즐기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그렇게 소요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 40이 훨씬 넘어버렸다. 40세면 당시에는 노인 축에 드는 나이였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음직(蔭職)으로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했다. 음직이란 과거를 보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으로 벼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권율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도 성가실 정도로 권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강태공은 나이 80에 영달했는데 내 나이는 그보다 절반밖에 되지 않았거늘 벼슬은 무슨 벼슬인가.”
그런데 과거를 보기 전 산천을 유람하다가 권율은 장차 왜란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난이 일어나면 충실한 측근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쓸 만한 인재를 물색하다가 한 번은 송파나루를 건너다가 ‘여주장사’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이 ‘여주장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장군 밑에서 큰 힘이 돼 주었다고 전해온다.
그런 권율이 과거를 본 것은 46세 때인 선조 15년(1582)이니 사위 이항복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 뒤였다. 사람들이 사위보다 뒤늦게 무슨 과거냐고 비웃었지만, 권율은 그런 속물들의 평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대범하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명경과에 급제한 중늙은이 권율은 승문원정자로 임명돼 벼슬살이를 시작해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전라도도사·예조좌랑·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선조 21년(1588)에는 함경도 경성부판관으로 나갔는데, 2년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그가 왜 벼슬을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46세 급제… 임란때 광주목사 임명
그가 다시 관직에 나아간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선조 24년(1591)이었다. 의주목사 자리가 비자 논의 끝에 권율이 가장 적임자라는 결론을 보아 의주목사로 임명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4월에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권율이 쓸 만한 인재라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는가? 그에게 영남과 호남의 거진(巨鎭)을 맡겨야겠다” 하고 그날로 의주목사로 있던 권율을 광주목사로 임명했다.
권율은 전임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짐을 꾸렸다. 그런 그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권율은 “나라가 위급해 신하가 죽을 때인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느냐”면서 남행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급히 광주로 달려갔지만 도착해 집무를 개시하기도 전에 빨리 군사를 모아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임금의 행차란 다름 아니라 선조가 백성들 몰래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에 권율은 방어사 곽영(郭嶸)을 따라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 길에 올랐다. 당시 근왕군은 총 4만 명으로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곽영이 2만 명씩 나누어 거느렸는데, 이광은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삼았고, 곽영은 권율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으로 삼아 그해 4월 20일에 두 갈래로 나누어 북상했다.
이들은 직산에서 다시 합류하고, 경상감사 김수( )와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이끌고 올라온 군사와 또다시 합세해 수원으로 진격했다. 그때까지는 제법 군세가 왕성했으나 5월 5일에 벌어진 용인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권율과 백광언의 만류에도 이광이 왜적을 깔보고 무리하게 공격명령을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 전투에서 결국 백광언과 이지시가 전사했다. 이튿날 왜군은 이미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본진에서 구원군까지 달려와 초전에 참패한 조선군을 재차 공격했다. 잇따른 패배로 근왕군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용인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권율은 황진(黃進)·위대기(魏大器)·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휘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관내와 이웃 고을에 격문을 돌려 15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했다. 이때 격문 가운데 ‘장차 바다를 건너 대마도를 쳐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으니 권율의 기개와 포부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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