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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우리나라 초등학교 국어교과서(5-1)는 다섯 쪽을 배정해 김영옥(1919~2005·사진) 대령을 교육한다. 2010년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UC Riverside)는 한국이 국제무대에 세운 최초의 동포연구소를 대학 안에 설립하면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로 명명했다.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육청은 신설 공립중학교를 ‘김영옥중학교’라고 이름 지었다. 두 곳 모두 미국 사상 최초로 한국인의 이름을 딴 대학기관이며 중학교다. 이처럼 한민족이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던 ‘참군인’ 김영옥 대령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국방일보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전설적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김영옥 대령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때맞춰 북한의 권력계승과 천안함 및 연평도 사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과 긴장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어 김 대령의 일대기가 장병들의 군인정신을 고취하는 데 적지않은 시사점을 던져 줄 것이다. 모든 국군 장병이 그의 불패의 리더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영옥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미 육군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해방의 주역이었고 피사 해방의 장본인이었다. 로마 해방전에서 보여준 지략과 용기는 UPI통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고, 피사 해방전에서는 제갈공명을 무색하게 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사를 무혈해방시킨 주인공이었다. 프랑스에서 브뤼에르 전투를 치를 때는 적군의 생명까지 아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놓기도 했다.
그는 종전 후 예편해 성공적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했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자원 재입대, 유럽에서의 신화를 재현하면서 중부전선 60㎞ 북상의 주역이 됨으로써 휴전선이 현재 모습으로 생기게 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1951년 5~6월 중부전선에서 있었던 일로 당시 38선 이남에 형성돼 있던 전선이 그만큼 북상한 것은 그가 이룬 불패신화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이 같은 업적은 당시 전선에서 함께 피를 흘린 모든 국군 및 유엔군 장병, 이름 한 자도 남기지 못하고 숨져간 전몰장병 등이 함께 이룬 것이다.
6·25전쟁에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 야전대대장이 됐다. 6·25전쟁 때는 보통 미군들의 한국전선 복무기간의 2배인 18개월 동안(전상으로 인해 일본으로 후송돼 입원해 있을 때와 주한미군사령부와의 업무협의를 위해 전선을 떠났던 며칠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의 휴가도 없이 전장을 지켰다.
이처럼 최전선을 지키는 한편 전쟁고아 수백 명을 돌보기도 했다. 당시 그가 돌봤던 고아들은 훗날 예술가·과학자·사업가·교수·목사 등 성실하고 성공적인 민주시민으로 자라났다.
한국에서 포성은 일단 멈췄으나 세계가 본격적 냉전의 시대로 돌입했던 1950년대 후반 유럽에서 미 제7군 작전장교로 있을 때는 옛 소련의 유럽 침공에 대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의 방어계획 수립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63~65년 한국군 군사고문 시절에는 한국에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질 경우에 대비한 한국방어계획 재편, 청와대 경호부대와 수도방어사령부 정비 등을 통해 이후 한국이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군사적 방패가 됐다. 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인 제111방공포병대대와 제222방공포병대대도 그가 한국의 영공 방어력이 취약한 점을 우려해 유엔군사령관을 설득해 출범시킨 것이다.
1972년 예편한 후에는 미국 정계·재계의 영입 유혹을 뿌리치고 재미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재미일본인사회를 포함해 타인종을 위한 사회봉사 활동에 일생을 바쳤다. 한인건강정보센터나 한인타운청소년회관 등 오늘날 한국 정부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남캘리포니아 소재 5대 비영리단체 가운데 4개가 그의 리더십 아래서 태동하거나 발전의 토대를 닦았으며, 현재 재미일본계의 자존심이자 정치적 영향력의 근원인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일본계 미군 장병 참전용사회나 일본계 이민사박물관도 그의 리더십 아래에서 태동하고 발전했다.
이 같은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오로지 침묵과 겸손으로 일관했고 여기에 우리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업적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업적에 대한 공적조사를 다시 한 프랑스가 자국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여한 것이 2003년, 한국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것이 2006년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자국 최고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하지 않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과거의 인종차별을 시정한다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인종차별로 인해 명예훈장을 받지 못했던 아시아계 미군 장병에 대한 공적조사를 다시 해 22명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을 때도 김영옥은 최종 리스트 26명에 들어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배제됐다. 재미한인사회가 무관심했고 정치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앞서 미국은 김영옥에게 특별무공훈장 1개, 은성무공훈장 2개, 리전 오브 메릿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퍼플하트 3개 등 훈장을 무더기로 안기기는 했으나 아직도 명예훈장만은 주지 않고 있으니 커다란 숙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김영옥이 여러 나라에서 훈장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가 단순히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어느 전쟁영웅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군복을 벗은 후 어찌 살다 보니 그렇게 된 어느 사회봉사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김영옥은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고아·입양아·청소년·장애우·노인·가정폭력 피해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랑스러운 우리 선배인 실존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국도 없는 이민자의 아들이라는 설움,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따른 가난, 법적으로 인정되는 인종차별, 전상으로 인한 신체장애라는 여러 난관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극복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우리 국군장병은 궁극적으로는 전설적 군인이면서도 아주 멋진 한 인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도 보다 가깝게 보고, 미국과 미군의 내면에 대해서도 깊이 보게 될 것이다. 특히, 미군 장교로 참전해 최일선 대대장을 지냈던 그를 통해 6·25전쟁의 여러 실상과 미군의 이런저런 모습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얻은 이해는 우리 장병 개개인을 발전시키고 군을 더욱 강하게 해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평화통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일조할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의 소박한 희망을 여기 되새기며 모든 국군 장병에게 그의 이야기를 바친다.
안지오 상륙 성공 연합군 로마 점령 눈앞에 / 201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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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참전도. | 1943년 9월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은 결국 ‘구스타프 라인’(Gustav Line)을 돌파하지 못한 채 새해를 맞았다. 구스타프 라인은 독일군이 북진하는 연합군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에 허리띠를 둘러친 것처럼 지중해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이어지는 독일군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었다.
연합군은 구스타프 라인을 북쪽에서 협공하고 로마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도 얻기 위해 안지오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로마가 서울이라면 안지오는 인천쯤 되는 로마의 외항으로 유서 깊은 항구도시이자 요새였다.
불과 2개 사단으로 감행된 안지오 상륙작전은 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처럼 대성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안지오 상륙작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해 로마에 극소수의 통신대와 순찰병력만 남겨두고 있어 연합군은 불과 1시간이면 로마를 무혈점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격적인 안지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 사령관 루카스 소장이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며 시간을 끌자 독일군은 즉시 북이탈리아에서 대군을 불러들여 안지오를 포위해 양측은 장기적인 대치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5월로 접어들자 이탈리아 전선의 미군 총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중장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격을 단행하기로 했다.
클라크 장군은 후에 한국전쟁 때 리지웨이 대장에 이어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인물로 전형적 군인이라기보다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승리가 빛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연합군은 테베레 강을 따라가며 펼쳐지는 로마 서남쪽의 낮은 산악과 평원 대신 로마 남쪽에서 병풍처럼 로마를 감싸고 둘러쳐진 보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로마 서남쪽의 평원을 제외하고는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던 유일한 평원인 안지오 남쪽의 평원은 무솔리니 해협과 수천 개의 작은 늪으로 둘러싸여 탱크를 앞세우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이곳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로마제국 시절 남이탈리아에 건설된 연안도로로 현대 이탈리아에 와서는 7번 고속도로로 개조된 ‘비아 아피아’가 이어지는 곳이라 일단 성공하면 로마로 연결되는 도로망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문제는 독일군이 북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인 정예 탱크사단을 어디에 배치해 두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처음에는 독일군 탱크사단이 어디 있는지 알았지만, 수개월 전부터 탱크사단을 놓쳤다. 독일군이 연합군의 주공을 정확히 예측하고 시스테르나에서 시작되는 연합군의 공격로에 정예 탱크사단을 매복시켰다면 만사는 물거품이었다. 당시 미군 탱크는 독일군 탱크보다 훨씬 성능이 뒤졌고 연합군이 제공권을 갖고 있긴 했지만 벨레트리부터는 지형상 공군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길로 공격하는 것은 집단자살행위였다. 공격이 실패하면 안지오의 연합군은 지중해로 내몰려 이탈리아 전선의 판도가 통째로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적정이 너무 빈약했다. 가장 정확한 적정파악 수단은 포로 생포였는데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는 포로가 잡힌 적이 없었다. 5군 전체가 독일군 포로를 잡기 위해 비상이 걸렸으나 독일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포로를 잡으려고 애쓰기는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은 기계화 낙하산부대를 연합군 후방에 침투시켜 후방교란과 포로생포를 함께 시도했다.
5군사령부로부터 빨리 포로를 잡아오라는 독촉이 6군단 본부로, 다시 34사단 본부로 빗발치듯 쏟아졌다.
보병으로 잔뼈가 굵어 여간해서는 무리한 명령을 잘 내리지 않던 34사단장 찰스 라이더 소장도 인내의 한계점에 다다른 듯 예하 부대를 심하게 독촉했다. 포로를 잡기 위해 여러 번 수색대가 파견됐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어떤 때는 분대나 소대 규모가 투입되기도 하고 두 번은 1개 중대 전체가 여러 대의 탱크까지 동원해 포로사냥에 나섰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영옥이 속한 100대대에서도 포로 생포가 발등의 불이었다. 게다가 영옥은 대대정보참모였기 때문에 포로 생포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임무라고 생각했다. 영옥은 대대장 고든 싱글스 중령을 찾아갔다.
“저를 보내주시면 포로를 잡아 오겠습니다.”
“미친 소리!”
“반드시 살아오겠습니다.”
싱글스 중령은 펄쩍 뛰었으나 영옥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영옥은 대대장을 찾아가기 전부터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100대대가 소속된 미 육군 34사단은 당시 미군들이 주인 없는 땅이라고 부르던 지역을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영옥은 앞서 포로 생포에 나섰던 수색대들이 실패한 원인이 피아의 경계가 높아지는 야간에 대병력이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쌍안경이나 관측경을 통해 적의 동태를 살필 때 각자 일정한 구획을 정해 놓고 있다. 우선 적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다음은 양 진영을 갈라놓고 있는 ‘주인 없는 땅’의 움직임을 쫓는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움직일 수 없다. 반면 아군 진영에는 무관심하다. 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밤이 되면 경계를 높이다가 동이 트면 경계를 풀듯, 이 점 역시 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색대의 수도 문제다. 지금까지 분대나 소대, 심지어 중대까지 동원됐는데 그 자체가 틀렸던 것이다. 병력이 많으면 눈에 띄기 쉽고 소음도 많고 기동력도 떨어질 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 피해도 커진다. 결론은 간단하다. 극소수로 백주에 침투하는 것이다. 밤에 ‘주인 없는 땅’을 지나 적당한 장소에 매복해 있다가 낮에 적진에서 움직인다면 승산은 있다.’
대대장은 영옥의 계획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 연대본부로 보냈고 연대장 역시 승인할 수 없다는 단서를 붙여 사단본부로 보냈다. 사단본부도 `불가'라는 단서를 붙여 군단본부로 보냈고 영옥의 계획은 같은 방식으로 5군사령부까지 올라갔다. 군사령부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군사령부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결행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회신해 왔다. 대대장은 영옥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영옥이 처음 싱글스 중령에게 수색을 자원한 지 열흘 만이었다.
영옥은 즉시 구체적인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영옥은 대대장에게 결심을 말하기 전부터 사단본부에 지역 항공사진을 요청했었다. 100대대가 이미 이탈리아에서 7개월 넘게 전투를 치르면서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었는지 특정지역을 정찰지역으로 한정하고 사단본부에 자세한 항공사진을 요청하자 사단은 매일 정찰기를 띄워 사진을 찍어 넘겨왔다.
독일군 포로를 잡아와야겠다 함께 갈 사람 없나?” / 201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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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유럽에 주둔한 독일군은 패배를 모르던 강군이었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준비 중이던 38년 9월의 독일군 수뇌부. |
영옥이 어느 지역을 특정해 요청하면 그 지역의 사진이 넘어 오는 데는 이틀 정도 걸렸는데 이러기를 한 열흘 계속하자 여러 각도와 높이에서 일대의 지형을 찍은 입체사진이 수백 장을 넘었다. 영옥은 사진들이 어느 정도 쌓이자 대대가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농가로 들어갔다. 영옥은 농가 창문에 걸어둔 담요 뒤로 몸을 감추고 쌍안경으로 지역을 관찰해 사진과 지도 대조하기를 계속했다.
사람이 누구나 자기만의 독특한 재능을 한두 가지씩 타고 나는 법이라면 영옥에게는 지도를 읽는 능력이 그런 것 가운데 하나였다. 영옥이 육군 간부후보생 학교에서 독도법을 배울 때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지도를 보면 그 지형을 그대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이 능력은 산야에서 전투를 이끌어야 하는 보병장교의 입장에서는 천혜의 선물이었다. 게다가 영옥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모습이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머릿속에 남곤 했다. 농가의 담요 뒤에서 영옥은 지도를 보고 상상한 지형과 실제 지형을 비교하면서 지형의 높낮이부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안지오를 중심으로 평원에서 해변을 등지고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독일군은 로마 남쪽의 산악지대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쌍방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데 있어서도 독일군이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다.
미군과 독일군은 가운데 있는 평원의 중간쯤에 서로 철조망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다. 양측의 철조망 사이는 2미터쯤 됐는데 주인 없는 땅이란 철조망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곳은 다시 반으로 나뉘어 미군 쪽 반에는 미군이, 독일군 쪽 반에는 독일군이 각각 지뢰를 깔아뒀는데 미군은 들개 한 마리 무사히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지뢰를 깔아두고 있었다. 당연히 독일군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양측은 철조망 바로 뒤 1미터쯤 떨어진 곳에 철조망을 따라 가며 긴 참호를 파고 그 참호 뒤로 다시 개인참호를 군데군데 파두고 있었고 철조망으로부터 30미터쯤 떨어진 지점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가며 1개 소대 병력이 들어갈 만한 지하벙커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양측 모두 밤이면 철조망 바로 뒤의 긴 참호에 병사들이 나가 있다가 동트기 직전에 철수했다. 개인참호에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병사들이 나가 있었다. 양측 모두 움직이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총을 쏴댔기 때문에 철조망에서 좀 떨어진 개인참호조차도 밤이 되거나 동이 트기 전에 교대해야 했다. 병사들은 참호에 나갈 때는 몇 끼 분 식량을 갖고 갔고 용변도 참호 속에서 해결해야 했다. 부상자가 생겨도 밤이 돼서야 후송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계획대로라면 야음을 틈타 아군 지하벙커와 개인참호를 지나 그 밤이 새기 전에 아군의 긴 참호, 아군 철조망, 아군 지뢰밭을 통과하고 적군 지뢰밭, 적군 철조망, 적군의 긴 참호를 통과해 동이 튼 다음 적진에서 움직여야 했다.
눈 주위에 쌍안경 자국이 남을 정도로 침투지점을 물색하고 있는데 적군 철조망 너머로 나무 한 그루 없이 평평한 밀밭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군은 미군이 감히 그곳으로 그것도 대낮에 침투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쌍안경은 독일군이 밤새 깨어 있다가 동이 트면 아침을 먹고 잠든다는 사실도 가르쳐줬다. 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영옥은 병사 한 명만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대낮에 적군 눈에 가장 잘 띌 수 있는 곳으로 침투해 포로를 잡아온다는 계획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기 때문에 같이 갈 사람은 자원자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모회의를 마치고 정보과로 돌아온 영옥이 말을 던졌다.
“독일군 포로를 좀 잡아와야겠다. 함께 갈 사람 없나?”
마치 다음 날 피크닉을 같이 갈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 말투였다. 영옥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해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부산을 떠는 일이 없었다. 영옥의 그 같은 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 줬다.
영옥이 이야기를 하자 데리고 있던 병사 네 명이 모두 자원했다. 요시오 미나미 하사, 어빙 아카호시 일병, 제임스 구보카와 일병과 또 다른 병사였다. 그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사상자가 많이 생겨 정보과에는 다섯 명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 미나미 하사, 아카호시 일병과 구보카와 일병은 모두 호놀룰루 출신으로 원래는 탱크공격조 소속이었는데 셋이 똘똘 뭉쳐 다니며 스스로 삼총사라고 부르던 병사들로 영옥이 소대장으로 있던 2소대가 서전을 치르고 보충병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자 세 명 모두 전속을 요청해 영옥의 소대로 왔었다. 셋은 항상 함께 움직이곤 했는데 소대장으로 있던 영옥이 600고지 전투에서 부상해 소대장이 바뀌자 더 이상 2소대에 있고 싶지 않다며 대대정보과로 지원해 정보과에 있었고 그동안 퇴원한 영옥은 정보참모가 돼 다시 같이 근무하고 있었다. 영옥은 하루 저녁 생각해 보겠다며 모두 돌려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데려갈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우선 둘 다 잡히거나 죽었을 때 잠시라도 정보과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어야 했으므로 정보과 차선임자인 미나미 하사가 제외됐다. 외아들이었던 구보카와 일병은 마음을 바꿔 자원을 철회했다. 영옥은 기혼자였던 다른 한 명도 제외시키고 아카호시 일병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영옥이 아카호시 일병만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평소 과묵하고 명령에 절대복종하던 미나미 하사조차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카호시 일병은 일본 구마모토에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로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한 일본인 부부의 4남4녀 가운데 막내였다. 부모는 하와이행 이민선을 타긴 했지만 캘리포니아로 가서 살고 싶어했는데 호놀룰루 부두에서 그들을 마중했던 아카호시의 이모와 포옹하는 사이에 일본에서 가지고 왔던 전 재산인 가방을 도둑맞아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잠시 기착하기로 한 호놀룰루가 제2의 고향이 된 사람들이었다. 아카호시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한 달 전 징집됐다. 3남인 그의 바로 위 형도 진주만 기습 후 자원입대해 미 육군정보부대 소속으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싸우고 있었다.
아카호시 일병은 극소수로 적진에 침투한다는 영옥의 계획이 마음에 들어 자원했고, 영옥은 그가 평소에는 아주 내성적이지만 일단 마음을 정하면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성격으로 포로사냥 임무에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결정을 내린 영옥은 즉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5월 16일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뚫고 독일군 지뢰밭 통과 / 2011.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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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을 시찰하고 있는 미국 정부 VIP와 대화 중인 사카에 다카하시 대위(왼쪽에서 둘째). 오른쪽 3성 장군이 미5군단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중장. |
영옥이 침투로로 택한 지역은 B중대 담당으로 중대장은 사카에 다카하시 대위였다. 영옥은 다카하시 대위에게 반드시 밤 10시 이후 미군 쪽 철조망을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끊어 두고 지뢰도 제거한 다음 중대 최고의 브라우닝 기관총 사수 3명을 데리고 밤 10시 30분에 B중대가 지휘본부로 사용하는 농가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브라우닝 기관총 조는 적진에서 탈출할 때를 대비한 엄호병력으로 보통은 사수와 부사수가 한 조를 이루지만 수효가 많으면 들킬 가능성이 커 사수 3명만으로 제한했다.
영옥은 아카호시 일병을 데리고 정각 10시 30분에 약속장소로 갔다. 계절은 이미 여름의 문턱으로 다가서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의 밤은 여전히 추워 영옥과 아카호시 일병은 두꺼운 속옷을 입었다. 무장은 각자 권총 1정, 미군들이 ‘타미 건’이라 부르던 톰슨 기관단총 1정, 수류탄 2발이 전부였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철모 대신 털모를 썼다.
영옥과 아카호시 일병, 그리고 3개 기관총 조를 포함한 다카하시 대위의 엄호병력은 곧바로 농가를 떠나 4시간 만에 미군 쪽 철조망 바로 뒤에 있는 참호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영옥과 아카호시 일병만이 함께 움직이기로 돼 있었다. 잠시 영옥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고는 건투를 빈다며 악수하던 손에 잔뜩 힘을 주던 다카하시 대위가 갑자기 영옥을 당겨 안으며 울먹였다.
“ ‘영’, 너는 미친놈이다. 죽을 것이 뻔한데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다니. 우리의 만남도 오늘로….”
영옥도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당장 지나야 하는 독일군 지뢰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옥은 옆에 서 있던 아카호시 일병을 바라보며 고갯짓으로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영옥과 아카호시 일병은 미군 철조망과 지뢰밭을 통과한 다음 땅에 엎드린 채 한 뼘씩 한 뼘씩 손으로 더듬어 지뢰밭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다카하시 일행이 돌아가는 소리가 어둠을 타고 들려왔다. 기관총 조는 미군 철조망 바로 뒤에 있는 참호에서 영옥 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 자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기관총 조에는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잡음을 내지 않기 위해 음식도 먹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진 상태였다.
손목에서 다섯 개 손가락 마디 끝까지 퍼져 있는 모든 신경을 동원해 바닥을 더듬고 지면에서 조금 떨어진 허공까지 확인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당시 독일군은 두 가지 종류의 지뢰를 사용했는데 한 가지는 직접 밟으면 터지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지뢰에 연결된 전선을 발로 차거나 건드리면 터지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아주 절묘하게 지뢰를 매설해 자칫하면 몸이 가루가 될 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폭이 1미터밖에 안 되는 독일군 지뢰밭을 통과하는 데 40분이 지나갔다. 둘은 독일군 철조망에 바짝 다가가 숨을 죽이고 몇 분간 동정을 살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철조망 절단기를 들이댔다. 다행히 바람이 세게 불어 철조망 끊어지는 소리는 곧바로 바람 속에 묻혔다. 둘은 조심스럽게 철조망을 통과했다. 이제부터 적진이었다.
■ 철모 대신 군용 털모자를 쓴 이유
사실 영옥이 이날만 철모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영옥은 습관적으로 철모를 쓰지 않았다. 당시 미군은 장병을 보호하기 위해 철모를 쓰지 않고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벌금을 물렸는데 1회 위반에 50달러였다. 그때 미국 육군소위 월급이 한 달에 약 40달러였으니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영옥은 철모를 쓰지 않고 싸웠다. 처음에는 적군이 철모를 보면 사격을 해온다는 사실을 알고 차라리 철모를 쓰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철모 대신 군용 털모자를 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차츰 털모자에 익숙해지자 철모를 쓰면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로마해방전을 치르고 얼마 지난 후부터는 정보참모·작전참모가 돼 무전기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많아졌는데 무전기를 사용하는 데는 철모가 대단히 성가신 존재였다. 그래서 영옥의 부대에서는 전투 중에도 영옥을 찾으려면 철모를 쓰지 않고 싸우는 사람을 찾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자 상관들도 철모를 안 쓰고 싸우는 영옥의 모습을 부대의 마스코트처럼 인정해 영옥에게는 철모를 안 쓰고 싸워도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인정했다.
나중에 북이탈리아에서 영옥이 사세타 전투를 기적적 승리로 이끌었을 때는 연대장 찰스 펜스 대령이 전과에 만족해하며 이 전투를 위해 작전을 세우고 일일이 명령을 내렸던 영옥을 치하하려고 일부러 철모를 쓰지 않고 영옥을 만나러 와서는 자기가 철모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영옥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철모를 쓰지 않는 것 외에도 영옥에게는 기벽이 더 있었다.
하나는 상황과 상관없이 참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옥도 이탈리아 살레르노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실전이 시작된 후 처음 두세 번은 참호에서 잤지만, 곧 참호를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 역시 다른 미군들처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죽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미군들은 전장에서의 죽음을 두고 “적탄에 내 군번이 적혀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죽는다”고 말하곤 했다.
잠을 잘 때면 참호 대신 맨땅이나 적당한 장소에 판초를 깔고 잠깐씩 눈을 붙였다. 부소대장 다케바를 비롯한 소대원들이 영옥을 걱정해 대신 참호를 파 주었지만 쓰지 않았다. 실전에 대해 취재하다 보면 피곤함에 찌든 소대원 전체가 포탄이 작렬하는 상황에서도 참호를 파지 않고 잠을 청했다는 증언도 듣게 되나 전장에서 아예 참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사생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기벽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까지는 몰라도 아무튼 전장에서 끼니를 거르는 횟수가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병사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장에서 책임감 있는 장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할 일은 너무 많았고 시간은 없는데 식사를 제때 챙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그의 부하였던 일본계 병사들이 항상 영옥의 음식을 따로 챙겨두곤 했지만, 결과는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훗날 영옥은 6·25전쟁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유색인으로서 야전대대장이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대대장이 된 다음에 전담 당번병이 있는 상황에서도 최일선 대대장이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적진속 숨막히는 포복 전진 마침내 참호 접근 / 2011.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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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해방전에서 김영옥의 독일군 포로 생포 소식을 지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한 1944년 7월 9일 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지. | 철조망과 참호 사이의 거리가 불과 1미터밖에 되지 않는 데다 적군들이 있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둘은 그대로 바짝 땅에 엎드렸다. 손만 뻗으면 적군의 철모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땅의 냉기가 온몸을 엄습해 왔지만 기침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대로 꼼짝없이 엎드린 채 4시간쯤 지나자 멀리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참호 속이 소란해지면서 독일군들이 참호에서 나와 대열을 지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철조망 바로 뒤의 참호는 낮에는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교대 병력이 없었다. 밤에 참호를 지키던 보초들은 1개 소대 병력인 듯싶었다. 둘은 10~15미터의 간격을 두고 반쯤 포복한 상태로 독일군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중무장한 소대 병력의 적군들은 밤을 무사히 넘기고 자기 진영에서 진지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둘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독일군은 훈련 방식이 미군과 다르기 때문인지 개인 참호에 있는 것 같은 초병들이 가끔 미군 방향으로 무작정 총을 갈겨대곤 했다. 잠입하는 미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 불특정한 표적을 향해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밤에는 위치 노출을 꺼려 사격을 통제하는 미군의 야간사격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이 같은 독일군의 사격 방식도 행운이었다. 드르륵 총소리가 날 때마다 총구에서 불꽃이 일어 초병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사격 덕분에 이들을 따라가면서 초병의 위치를 미리 알 수 있었고 참호 2개를 통과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둘은 독일군들이 지하벙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영옥이 항공사진에서 매복지점으로 봐 뒀던 작은 도랑으로 들어갔다.
말이 도랑이지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도랑은 말라 있었다. 둘은 그곳에 엎드려 완전히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목표는 낮은 구릉지대의 토치카였다. 이 토치카는 영옥이 쌍둥이 나무라고 이름 붙였던 두 그루의 나무들 사이에 있으면서 기관총 2대가 나란히 배치돼 있었다.
철조망에서 230미터쯤 떨어진 토치카의 기관총 배치 상태로 봐서 근처 어딘가에 상급부대 본부가 있는 것 같았다.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본부에 근무하는 포로를 잡아와야 했다.
영옥은 분대 병력쯤이 지키고 있을 것 같던 이 토치카를 뒤에서 기습해 대부분 사살하고 나머지 한두 명만 잡아올 생각이었다. 지하벙커로 들어간 독일군은 소대 병력에 중무장하고 있어 두 명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동이 트면서 새벽을 인도하는 바람은 독일어와 금속성 마찰음을 함께 싣고 왔다. 적군 병사들이 잡담하며 총기를 닦는 소리였다.
영옥은 아카호시 일병과 지금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음에 안도하는 눈빛을 교환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다시 시간이 흐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위가 잠잠해지면서 이번에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옥은 조심스레 왼쪽 팔을 끌어당겼다. 9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농가의 담요 뒤에서 쌍안경으로 적진을 관찰하면서 외곽 참호의 독일군 보초들이 가장 방심하는 순간임을 알아챈 시각이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 아침을 먹고 잠드는 시간이기 때문에 독일군 보초들도 긴장을 풀었던 것이다.
구릉지대에 설치된 관측소의 독일군이 감시하겠지만 감히 자기 진영에서, 그것도 낮에 미군 한두 명이 들어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맞아떨어지기만을 기대하면서 영옥은 아카호시 일병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둘은 상처가 날 정도로 볼을 땅에 바짝 붙이고 기면서 등이 높아질까 봐 숨도 크게 쉬지 않고 도랑에서 나와 밀밭으로 들어갔다.
지하벙커에서 보이지 않도록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며 토치카 뒤로 돌아가기 위해 포복을 시작했다. 완전히 포복한 상태로 조금 기다가는 멈춰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기다가는 또 멈춰 상황을 파악하는 동작이 끝없이 반복됐다.
아카호시 일병은 뒤에서 기어가면서 포복으로 체중이 지면에 분산돼 실리기 때문에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지뢰를 건드려도 터질 가능성이 낮으리라고 계산하면서도 앞서 가는 영옥의 몸이 지뢰가 터지면서 공중으로 솟구치는 장면을 계속 떠올렸다.
아카호시 일병은 영옥의 몸이 큰 대(大)자 모습으로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자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했다.
산적처럼 등 뒤로 멘 기관단총을 벗겨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총을 갈겨대다가 적탄에 맞는 모습과 벌떡 일어나 뒤돌아 뛰어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교차했다. 갈팡질팡하는 생각 속에서 기어가던 아카호시 일병은 한편으로 우스꽝스럽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미군 진영의 수많은 눈동자는 누구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옥이 침투에 앞서 적진을 관찰했던 농가 2층 바로 그 자리에 이번에는 대대장 싱글스 중령이 숨을 죽이고 서서 쌍안경으로 둘을 좇고 있었다. B 중대장 다카하시 대위의 숨결도 영옥과 아카호시 일병을 따라 움직였다.
지면에 딱 달라붙은 상태에서 기다가 멈추다가 하면서 커다란 반원을 그리듯 550미터를 가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밀밭은 무릎 높이 이상으로 자라 있어 포복한 둘을 감싼 데다 다행히 바람도 세게 불어 둘의 체중이 밀밭에 남긴 흔적도 금방 사라졌다.
아카호시 일병의 앞에서 기어가던 영옥이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토치카 부근의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토치카 옆에는 작은 개인 참호가 있었고 참호 속에는 독일군 병사 두 명이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원래 목표했던 토치카에는 적어도 1개 분대쯤은 있었을 것이고 두 명이 1개 분대와 맞닥뜨렸다면 포로를 잡기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행운치고는 너무도 절묘한 행운이었다.
아카호시 일병에게 곧장 정면으로 다가서게 하면서 영옥은 다시 작은 반원을 그리며 참호로 다가갔다.
독일 병사 두 명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참호는 바닥에 앉아서 등을 기대면 다리를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았는데 두 적병은 양쪽 무릎을 접어 세운 다리 사이로 서로 상대방의 다리를 낀 자세로 머리를 약간 뒤로 참호 벽에 기댄 채 입까지 벌리고 잠에 빠져 있었다.
둘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등에 메고 있던 톰슨 기관단총을 벗겨 들고 두 독일군 병사의 벌려진 입속으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금속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잠을 깬 독일군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영옥은 아무 말 없이 오른손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기관단총을 받쳐 들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곧추세우며 소리 내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함께 무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올리라고 제스처를 하자 독일군 병사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영, 특별무공훈장을 받게 됐다” / 2011.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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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미 육군중장이 1944년 초 이탈리아에서 김영옥 중위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 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클라크 장군과 김영옥의 인연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 아카호시 일병이 독일군 병사들이 내려놓은 소총을 발로 밀어 치우자 독일군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자동권총까지 빼서 내려놓고는 참호에서 나왔다.
그 순간 잠깐 생각에 잠긴 아카호시 일병이 기관단총을 다시 등에 메더니 가슴에 차고 있던 수류탄 두 발을 떼어 내 양손에 들고는 영옥을 쳐다봤다. 영옥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카호시 일병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지 않은 채 참호 바닥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다른 독일군이 참호에 왔을 때 미제 수류탄을 보고 초병들이 포로로 잡혀갔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포로가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적이라도 탈영병으로 취급받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는데 사실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영옥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던 것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영옥도 아카호시 일병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참호에서 나온 독일군들은 영옥이 시키는 대로 앞서 기기 시작했다. 맨 앞은 독일군, 다음이 아카호시 일병, 다음은 또 다른 독일군, 마지막이 영옥이었다. 일단 포로를 잡은 다음에는 직선 코스를 택했다. 일행이 넷으로 불어났기 때문에 머뭇거릴수록 발각될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 돌아올 때에도 독일군은 자기 진영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둘은 미군 철조망을 지날 때까지 그대로 포복을 계속했다. 돌아올 때는 대낮이었기 때문에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둘은 브라우닝 기관총조가 대기하고 있던 참호까지 오자 포로들을 밀어 넣고 자기들도 참호 속으로 몸을 굴렸다. 영옥은 곧바로 무전기로 싱글스 중령에게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했다.
남은 일은 그대로 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7시가 되자 다시 어둠이 깔렸고 양측 참호에는 초병들이 도착했다. 포로들을 데리고 몸을 낮춰 B중대 본부로 귀환했을 때는 이미 사단본부에서 나온 지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독일 손님은 하사와 일병이었는데 많은 정보를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미군은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도 얻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복장과 부대 마크는 그들이 탱크사단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연합군은 마치 영화 같은 포로생포 소식에 광분했다. 영옥은 대대로 귀환해 보고를 마치자마자 연대본부, 사단사령부, 군단사령부, 군사령부까지 연속해 불려 다니며 보고해야 했다. 영옥이 군사령부까지 보고를 마치고 다시 대대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던 대대장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한다, 영. 특별무공훈장을 받게 됐다.”
“그럴 리가요. 특별무공훈장은 서류심사만 몇 달은 걸릴 텐데요.”
“정말이다. 방금 클라크 사령관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3분만 일찍 왔어도 전화를 받았을 텐데. 클라크 장군이 특별무공훈장을 주기로 했다고 알려주면서 직접 축하하고 싶다고 전화까지 한 거야.”
영옥의 포로생포 소식은 UPI통신 종군기자를 통해 즉각 전 세계로 타전됐다.
한 달 후 거행된 훈장수여식은 클라크 사령관이 직접 주재했는데 영옥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던 클라크 사령관은 깜짝 놀랐다. 영옥이 불과 몇 달 전 자신이 직접 은성무공훈장을 달아줬던 장본인이라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귀관은 얼마 전 내가 은성무공훈장을 달아줬던 그 중위 아닌가?”
“맞습니다.”
“자네가 왜 아직 중위인가?”
“사령부에서 진급을 안 시켜줬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정기 진급심사에서 탈락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클라크 중장은 옆으로 돌아서더니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백인 부관에게 명령했다.
“가까이 오라.”
부관이 다가오자 클라크 장군은 그의 대위 계급장을 떼서 영옥에게 꼽아주고 부관에게 지시했다.
“차질 없이 문서명령을 내도록.”
클라크 사령관은 다시 영옥을 향해 돌아서서 사과했다.
“이 훈장은 잘못됐다. 귀관은 명예훈장을 받았어야 했다. 다시는 오늘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 용서하라.”
이렇게 해서 영옥은 진급을 먼저 하고 문서명령이 뒷받침되는 독특한 사례의 주인공이 됐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은 미국 최고무공훈장으로 클라크 장군이 이탈리아주둔군인 미 5군의 사령관으로서 이 훈장 서훈을 본국에 상신할 수는 있었으나, 이 훈장을 주려면 미국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해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클라크 장군은 영옥과 아카호시 일병에게 워싱턴의 결재 없이도 자기 직권으로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훈장인 특별무공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를 주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특별무공훈장은 명예훈장에 이어 훈격 2위인 훈장이다.
이날 훈장수여식에서 클라크 장군이 기억해 냈던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은 이탈리아 상륙작전이 있은 지 얼마 후 이탈리아 남부 산타 마리아 올리베토 근처에서 있었던 야간전투에서 영옥이 2개 분대만을 데리고 독일군 기관총 진지 5~6개를 제거한 공로로 받은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어느 군인이 은성무공훈장 하나만 받아도 국가에 대한 그의 희생과 헌신을 인정하고 영웅으로 대접하며 감사해한다.
영옥이 포로를 잡아온 다음 날 사단장 라이더 장군이 영옥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대대본부를 방문했다. 라이더 장군은 영옥을 불러 공훈을 치하하고 영옥이 잡아온 포로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연합군이 곧 총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라이더 장군이 말한 총공격이란 ‘버펄로 작전’이었다. 5월 23일 여명과 함께 시작된 버펄로 작전으로 연합군은 로마를 지키는 독일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6월 4일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제3제국 정통성의 상징을 연합군에 넘겼다. 나치 독일이 스스로를 제3제국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신성로마제국이 잇고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자기들이 잇는다고 믿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나치의 입장에서 로마를 연합군에 내준다는 것은 참으로 뼈아픈 것이었다. 연합군은 로마해방 이틀 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결행했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승패의 명암을 확실하게 가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해방 직후 영옥에게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행정력을 회복하면서 공훈 등급을 재분류해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로써 영옥은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유일한 한인이 됐다.
영옥 부모 日식민지때 천신만고 끝 미국으로 / 2011.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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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노라 고는 이화여전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여성으로 유학을 위해 1916년 미국 으로 갔다.(왼쪽) 아버지 김순권은 조선이 일본의 천하로 바뀌기 시작하자 1906년 무렵 세 번의 밀항 시도 끝에 미국으로 갔다.(오른쪽) |
영옥의 부모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신음하기 시작하던 경술국치를 전후해 미국으로 갔다.
인천 출신으로 경신학교(경신 중·고교의 전신)를 나온 아버지 김순권은 20세기로 접어들며 한반도가 일본의 천하로 바뀌자 미국으로 가기로 하고 세 번의 밀항 시도 끝에 미국행에 성공했다. 순권이 미국을 택한 것은 그에게 신문물의 눈을 뜨게 했던 경신학교의 설립자나 초기 교장들이 전부 미국 선교사들이어서 미국 얘기를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와이에 도착한 일행은 사탕수수밭에서 열심히 일해 미국 본토까지 가는 뱃삯을 모아 시애틀로 갔다. 당시만 해도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로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시애틀을 거쳐야 했다. 일행은 다시 현지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해 어느 정도 노자가 모이면 남으로 움직이고, 다시 일해 노자가 모이면 또 남으로 움직였다. 캘리포니아가 목적지였던 일행은 결국 로스앤젤레스까지 가서 안착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 가운데 미국에서 순권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때는 1906년이다.
수원에서 태어난 어머니 노라 고도 미국 선교사가 세운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노라는 이화여전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경성성경학교에서 잠시 강단에 섰다가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더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려는 꿈을 지니고 후원자였던 선교사와 함께 1916년 미국으로 갔다.
노라가 시애틀에 도착하자 출입국관리 직원이 노라가 기혼자이므로 남편에게 도착 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권에게 전보를 쳤고 전보를 받은 순권이 즉시 로스앤젤레스로 오라고 답신을 보내 유학의 꿈을 접게 됐다. 두 사람은 이미 조선에서 법적으로 혼인한 상태였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천지의 학문이 아니라 호두껍데기를 벗기는 막노동이었다.
망명·유학·이민 등 어떤 목적으로 한국을 떠났든 일단 미국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다른 가난한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피땀 어린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많은 한국인은 그 와중에도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고 신용을 쌓아 편의점·야채가게·과일가게·세탁소 같은 작은 장사를 시작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성공적으로 일궈갔다. 말이 가게지 사실상 좌판 장사도 많았고 몇몇이 식당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한국인 수가 워낙 적어 한식당은 아예 없었다.
순권 부부도 처음에는 농장에서 막노동하다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있는 편의점을 인수했다. 이 편의점은 다른 한국인 부부가 백인으로부터 샀던 것인데 그들은 아주 부지런해 돈을 모아 가게를 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영어를 전혀 몰라 고객이나 세일즈맨과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공과금 고지서조차 읽지 못했다. 그러니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순권 부부에게 어쩔 수 없이 가게를 팔았다. 그들로서는 밑천을 몽땅 날리기보다는 가게가 꾸려지면서 다달이 얼마씩이라도 받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이 같은 거래 방식은 요즘도 미국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오너 캐리’(owner carry)라 부른다. 이것은 업체나 부동산의 소유주인 셀러(seller)가 바이어(buyer)의 신용이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면 매매대금의 일부만 선금으로 받거나 또는 전혀 돈을 받지 않고 매매거래를 한 후 대금은 장기에 걸쳐 원리합계를 매달 분할해 받는 것이다. 요즘도 빈손으로 미국에 간 한국인들이 성실히 일해 신용을 쌓은 다음, 이 방식으로 크고 작은 비즈니스를 입수해 성공적인 이민생활의 터전을 닦곤 한다.
순권 부부는 슬하에 4남 2녀를 뒀는데 영옥은 위로 누나 한 명이 있는 장남으로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순권은 첫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 이름은 한국식으로 지어야 한다며 돌림자까지 지켜 영옥이라 지었다.
어린 영옥은 부모의 야채가게나 편의점에서 일을 도우며 자라났다. 편의점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로 치면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들이 많이 사는 베벌리힐스나 말리부 같은 부자동네로 그곳엔 백인 부자들만 살았다. 주민들이 편의점에 전화로 물건을 주문하면 영옥이 배달을 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로스앤젤레스에는 전화가 몇 대 없었는데 편의점에 전화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장사가 잘됐다는 말이기도 했다. 가게가 잘된 데는 아버지의 유창한 영어도 도움이 됐지만 무엇보다 어머니가 매우 근면했고 근처에 다른 가게가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옥의 집안은 남가주 한인사회에서는 가장 부자였던 듯하다. 그때 미주 한인사회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신한민보는 남가주 한인들의 업체 규모 크기를 자본 순서대로 게재한 적이 있다. 이 신문은 김순권의 업체와 다른 한인 한 명의 업체가 자본금 5000달러라며 공동 1위로 게재했다. 요즘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자본금이 약 100만 달러인 편의점을 운영한 셈이었다. 그래도 영옥의 가족은 항상 돈에 쪼들렸다. 어릴 때 영옥의 형제들은 이것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매우 싫어했다. 아버지는 술과 친구를 좋아해 주말만 되면 어김없이 수십 명이 떼를 지어 가게로 몰려왔다. 이들이 대부분 미혼이라 외롭기 때문인지 주말이 되면 모여들었는데 어머니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술과 음식을 준비했고 음식은 항상 한식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먹고 마시며 밤을 새웠다.
어릴 때 영옥은 피곤한 어머니에게 일거리만 안겨주며 토요일 모임을 계속하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영옥의 눈에 아버지는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한다는 의미에서는 남편으로서나 아버지로서나 모두 실패자였고 비즈니스맨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 영옥의 형제들은 어려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가족이 항상 돈에 쪼들렸던 중요한 이유도 아버지가 항상 수입보다 많은 돈을 ‘동지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영옥의 가족에게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게에서 매주 토요일 밤을 조선에 대한 얘기로 지새웠던 수십 명의 한국인들도 모두 동지회원이었다.
동지회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하와이에서 출범시킨 대한인동지회를 말한다. 대한인동지회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미국 본토에 본부를 두기로 하고 영옥이 열 살이 되던 1929년 로스앤젤레스에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를 개설했는데 임병직 전 한국외교장관이나 알프레드 송 전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같은 인물이 모두 동지회 출신이다. 동지회원들은 동지회에 내는 지원금을 애국금이라 불렀는데 애국금을 내기 위해 결혼도 미루다가 혼기를 놓쳐 평생 독신으로 산 사람도 많았다.
아버지는 야학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는데 더듬거리며 의사표현이나 간신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고 영어신문도 두 개나 구독했다. 오늘날 재미동포가 200만 명 이상 된다지만 영어신문을 두 개씩 구독하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버지의 생활은 지적 사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아버지는 미국 정치나 세계 정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선거권이 없었어도 선거 때가 되면 출마자들의 공약이나 약력까지 훤히 꿰곤 했다.
“너는 감옥 가든지 아니면 큰 인물 될 거야” / 2011.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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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오른쪽 첫째)과 형제들. 오른쪽에서 둘째가 누나 윌라 김으로 93세라는 나이에도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는 세계 최고의 예술의상 디자이너다. |
가족의 저녁 식탁에서도 정치가 가장 중요한 화제였기 때문에 영옥의 형제들은 짙은 정치색 속에 자라났다.
“아무래도 생전에 조선이 해방될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너희도 조선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결국 미국 시민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처럼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강조했고 이를 위해 집에서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양식을 먹도록 했다.
아버지가 그런 식이니 가게 운영은 자연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편의점은 영업시간이 길고 노는 날도 없었다. 손님들이 출근길에도 들렀기 때문에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문을 열어 밤 10시가 지나야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일요일에도 가게를 열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은 가게에 남고 남편과 자식들만 교회로 보냈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교회에 가면 동포들과 만나 정치 얘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주 일요일 아침 자식들을 데리고 교회로 갔다.
1000명 안팎에 불과하던 당시 재미교포들의 이민생활은 크게 세 가지가 핵심이었다. 생업, 독립운동, 교회였다. 특히 독립운동과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는데 노선을 놓고 분열하기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다니는 교회만 보면 어떤 노선인지 알 수 있었다. 대한인 기독교회에 다니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원이고, 로벗슨한인연합감리교회에 다니면 안창호를 지지하는 국민회원이나 흥사단원이고 하는 식이었다.
독립운동 노선이 달랐던 이승만과 안창호도 심한 갈등을 빚었다. 안창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승만은 안창호의 유족에게 직접 조전을 보내는 대신 영옥의 아버지에게 전보를 쳐서 자기 대신 문상을 가 달라고 부탁해 아버지가 이승만의 조객으로 찾아갔을 정도였다. 영옥의 가족과 안창호의 가족은 몇 집 건너 이웃이었다. 영옥의 아버지는 안창호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이승만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해 이승만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할 때면 영옥의 집에 머물기도 했고 자식이 없던 이승만 부부가 영옥의 여동생을 수양딸로 삼으려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가족들이 한번 교회에 가면 아버지가 예배 후에도 친구들과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치 얘기를 했기 때문에 모두 해가 떨어져야 돌아왔다. 가족 중에 가장 경건한 신자인 어머니만 교회에 가지 못했으나, 어머니는 매일 새벽 눈을 뜨거나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어김없이 30분씩 기도를 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서너 번은 반드시 경건하게 기도를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일하는 모습과 기도하는 모습부터 떠오를 정도로 어머니는 근면하고 독실했다.
유학의 꿈을 접자 억척스러운 비즈니스우먼이면서 헌신적 아내로 변신한 어머니는 감을 아주 좋아해 땡감이라도 시중에 나오면 반드시 너덧 개씩 사 가지고 와 볕이 잘 드는 창틀을 골라 가지런히 놔두고 익혔다. 가족이 한 개씩이라도 먹으려면 여덟 개는 사와야 했지만, 돈을 아끼느라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남가주에서는 감이 잘 자라지 않아 감은 항상 중가주에서 왔다.
감이 아주 맛있는 과일이라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 영옥은 창틀에 놓여 있는 아직 익지도 않은 감을 어머니 몰래 먹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아직 초록빛을 머금은 감이 햇볕에 익어 주황빛으로 바뀌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어린 영옥에게 참기 어려운 즐거움이었다. 주황색으로 바뀐 감을 두고 둘러앉아 떠들고 웃으며 나눠 먹던 순간은 영옥의 가족에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고 감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영옥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영옥이 12살 소년으로 자라났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영옥이 하지 않은 일을 틀림없이 영옥의 짓이라 생각하고 안 했다고 부인하는 영옥을 단단히 가르치려 마음먹었다. 밖으로 나가 굵은 회초리 세 개를 꺾어온 어머니는 영옥에게 종아리를 걷고 목침 위에 올라서게 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후려치던 회초리가 부러졌다.
“어째서 잘못했다고,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 거냐?”
“전 하지 않았어요!”
영옥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거짓으로 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잘못을 빌지도 않겠다고 처음 목침에 올라 설 때부터 마음먹었다. 두 번째 회초리가 부르튼 종아리를 계속해서 내리쳤다. 처음에는 위압적이던 어머니의 어투가 차츰 애원하듯 바뀌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해라. 다신 안 하겠다고.”
“아뇨, 전 하지 않았어요.”
영옥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계속해서 매를 내리쳤다. 영옥의 종아리에선 피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회초리 세 개가 모두 부러지자 어머니는 피가 흐르는 영옥의 종아리를 감싸안고 울기 시작했다.
“너는 참으로 고집이 세구나. 다른 아이들은 회초리를 들기만 해도 벌써 잘못했다고 울며 비는데…. 너는 종아리에 피가 흐르는 데도 그냥 맞고 서 있구나. 팔이 아파 더는 회초리를 들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가 졌다. 네게 회초리를 드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 너는 앞으로 크면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가든가 아니면 아주 위대한 인물이 될 거다.”
이날 집에는 어머니와 영옥 단둘뿐이었고 이 일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았으므로 어머니와 영옥 둘만이 아는 일이었다. 아버지에게도 동생들에게도 일절 말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누나만 이 일을 알게 됐다.
영옥이 자라나면서 부모에 이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누나인 윌라였다. 아버지는 첫딸을 얻자 이름을 윌라라고 지었다. ‘나성의 달’이란 의미인 월나(月)의 발음과 가장 가까운 서양식 이름이었다. 나성(羅城)은 로스앤젤레스를 일컫는 한자 이름이다.
미국의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꿰뚫고 있던 아버지도 미국적 사고방식이나 매너까지는 잘 몰랐다. 누나는 영옥에게 말하고 옷 입는 법에서 매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르치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총명했던 누나는 나중에 세계 최고의 예술의상 디자이너가 됐다. 오늘날까지도 ‘세계 무대예술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인이자 토니상을 받은 유일한 한국인이다. 영화에서 아카데미상이나 언론에서 퓰리처상이 누리는 권위를 뮤지컬 분야에서 누리는 토니상은 사실 뮤지컬 관계자라면 후보지명만 돼도 이력서에 쓰는 상으로 누나는 다섯 번이나 후보로 지명됐고 두 번이나 수상자가 됐다. 현재도 93세라는 고령에 현역으로 활동하는 브로드웨이의 여왕이다.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1930년대에는 미국에도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던 사람이 많았는데 윌라도 20세를 전후해 사회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누나는 끔찍이 아끼는 동생 영옥에게 사회주의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영옥을 설득하려 했다.
그렇지만 영옥은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옳다고 믿지 않으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영옥은 누나나 누나의 친구들이 논리정연하게 펼치는 사회주의 찬양론을 들으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비롯해 사회주의 책들을 폭넓게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체계도 잡히고 깊이도 있는 견해를 갖게 됐는데 영옥이 내린 결론은 누나와 달랐다.
사회주의에 빠진 누나 때문에 곤욕치러 / 2011.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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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주인공인 새미 리(오른쪽) 박사와 김영옥은 죽마고우 였다. 사진은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아 영웅으로 선정된 두 사람이 2003 년 로즈 퍼레이드에서 꽃차에 탑승한 모습. |
영옥은 누나가 사회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작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8년 로스앤젤레스 도심에 있는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중국을 지원하는 ‘차이나 릴리프’(China Relief)라는 단체에 줄 기부금을 모으는 바자회에 관계했다. 이 바자회가 열린 것은 한 해 전 12월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벌어진 남경대학살 사건 때문이었다. 누나의 부탁으로 영옥은 누나와 함께 기금모금용 물건을 팔기 위해 바자회에 갔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로스앤젤레스 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혐의였는데 1심에서 25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문제의 조례가 연방헌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후에 영옥이 군대생활을 할 때도 인사기록카드에 적혀 끝까지 따라다녔다.
영옥이 센트럴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생들이 백인, 중국계, 일본계, 멕시코계, 유대계 등으로 다양했고 나이도 어려 자신이 유색인이라거나 소수계라는 느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로 진학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벨몬트 고등학교는 학생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인종차별도 공개적이었다. 학교가 소수계 학생들에게 허용하는 것은 일반 학과와 체육 활동뿐이었고 기타 과외활동은 일절 금지됐다.
“어디 출신이냐?”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 자주 물었다.
“한국이야.”
“한국이 어디냐? 중국이냐 일본이냐? 지도에 없는 나라도 있냐?”
“한국은 한국이야!”
영옥은 부모로부터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배웠고 이로 인해 한국인이라는 강한 정체감을 키웠다. 그렇지만 교사나 다른 학생들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으면 맥이 빠졌다. 한국이 중국이냐는 말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이 일본이냐는 말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나빴다. 부모로부터 일본계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일본계와는 놀지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음식도 먹지 못하게 했다. 외식을 자주 할 형편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해도 중식당이나 멕시코 식당은 가도 일식당만은 절대 가지 않았다. 백인 식당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주인들이 대놓고 푸대접을 하거나 손님들이 눈총을 줬다. 주인이 내색은 하지 않아도 음식에 잔뜩 소금을 뿌려 나온다거나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갈 수 없었다. 이탈리아 식당은 좀 나은 편이었으나 이곳 역시 아시아계가 들락거리면 백인손님이 떨어진다고 주인이 반기지 않았으므로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는 갈 수 없었다.
이 무렵 영옥은 어린 나이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교훈 하나를 터득했다. 출신국 같은 것들을 건수 삼아 시비를 걸어오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영옥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 타인종 출신이었다. 영옥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이탈리아계와 멕시코계가 수적으로 많아 늘 이들이 수도 적고 덩치도 작은 아시아계나 유대계 학생들을 골라 시비를 걸어 왔다. 그러면 아시아계나 유대계 학생들은 늘 싸움을 피했고 그럴수록 상대 학생들은 이를 즐기며 더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영옥은 비록 시비를 걸어오는 아이들의 덩치가 커도 애써 싸움을 피하지 않았고 일단 주먹다짐이라도 벌어질 때면 더 많이 얻어맞고 깨지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맹렬히 싸웠다. 그러면 상대가 다시는 자기를 건드리지 않았고 나아가 존중해주고 결국 친구가 됐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였지만 그때만 해도 유색인을 철저히 차별했다. 유색인이라 해서 모두 같은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흑인에 대한 대우가 다르고 히스패닉에 대한 대우가 다르고 아시아계에 대한 대우가 또 달랐다. 차별도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아시아계가 좀 낫고 어떤 것은 히스패닉이 좀 나았다. 말이 낫다는 것이지 사실은 어떤 것이 더 나쁜가 하는 문제였다.
같은 아시아계라도 출신국에 따라 대우가 또 달라 아마도 중국인에 대한 대우가 최악이었을 것이다. 중국계는 19세기 중엽 서부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중국계가 팽창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18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민이 일절 금지됐고 나중에는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다. 중국계가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백인이 중국계를 살해해도 목격자가 중국계밖에 없으면 증인이 없어 무죄가 된다는 뜻으로 캘리포니아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에 비해 일본계는 훨씬 나았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열강으로 부상한 덕택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인이 이민을 올 수 없을 때도 일본인들은 1907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이른바 신사협정 때문에 계속 이민을 올 수 있었다.
한국인은 그 사이에서 분명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집단이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은 중국인 이민이 금지된 후 시작됐으나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신사협정 이후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인의 미국 이민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한국인은 이민의 맥이 끊어졌는데 이것이 당시 재미동포 사회가 우선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양적 성장의 불능은 자연히 질적 성장의 불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시아계는 전체적으로 심한 차별을 받았으며 동시에 견제의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아시아계는 부동산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대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아시아계가 근본적으로 경제력을 키우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손기정에 이어 한민족이 두 번째로 탄생시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한민족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한 새미 리 박사(이비인후과 의사)를 보면 당시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새미 리는 48년 런던올림픽에서 10m 하이다이빙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뒤이은 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 2연패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 새미도 다이빙 연습을 하면서 공개적으로 수영장 출입을 하지 못했다. 유색인의 수영장 출입을 금했기 때문인데 다이빙 선수로서 새미의 자질을 알아본 코치가 밤중에 몰래 새미를 풀장으로 데려가 연습시켰다. 영옥과 새미는 아버지들이 독립운동을 같이 했을 뿐만 아니라 집도 가까운 죽마고우였고 평생의 벗이었다.
벨몬트 고교는 대학진학을 전제로 하는 인문계였는데 영옥이 이곳에 간 것은 자식들을 꼭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했던 어머니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영옥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으로 진학했지만 앞날은 우울하기만 했다. 주위에 이미 대학을 졸업한 선배도 있었고 이들 가운데는 학교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이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돌아오는 곳은 야채가게나 세탁소·정육점이었다. 철저한 인종차별 때문에 전공에 맞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아예 처음부터 취업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남인 영옥이 대학을 졸업해 줄 것을 간절히 원했지만 영옥은 대학을 나와 봤자 쓸데없다고 생각해 결국 일 년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방황하기 시작한 영옥은 집을 나가 인력거도 끌어보고 농장 막일도 해보고 세일즈맨도 해 봤지만 그저 그랬고 기술학교에서 자동차정비를 배워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합지졸 장병 `군인다운 군인 만들기' 돌입 / 2011.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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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옥은 모진 훈련만이 실전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신념을 갖고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사진은 훈련소 시절 100 대대 소속 일본계 미군 병사들. |
부대는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 없이 반복되는 기본교육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행군을 나가서는 안락한 장소를 골라 오전 야외강좌를 듣고 잠을 자다가 점심을 먹고 귀대하는 것이 전부였다. 도무지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었다. 부대훈련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교들의 사고방식도 문제였다. 100대대 장교들은 대부분 ROTC 출신이거나 아니면 하와이 방위군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병사들의 제식이나 행군 등 기본훈련에는 익숙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집중적으로 전투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다. 자연히 병사들에 대한 훈련도 실전 중심이 아니라 기본군사교육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대의 백인이나 일본계 장교들은 너무 자부심이 강해 자기들이 전투훈련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영옥은 기타오카와 대화를 끝낸 후 존슨 중대장을 찾아갔다. 중대장은 ROTC 출신으로 역시 하와이 방위군에서 복무하다 100대대에 합류한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영옥은 보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얘기하고 훈련방식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거 아주 괜찮은 생각인데. 그런데 솔직히 나는 보병을 잘 몰라. 나이도 이미 50이 넘어 너무 늙었고…. 그렇지만 이들이 진짜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바꾸긴 바꿔야 하겠는데 어떻게 바꾸지? 선임들은 아무도 자네 생각을 탐탁지 않아 할 거고….”
“제게 복안이 있습니다.”
영옥은 개인 단위의 훈련은 그만 하고 분대, 소대, 중대, 대대 단위의 부대훈련으로 바꿔야 한다면서 주머니에서 다음 1주 동안의 훈련계획서를 꺼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아 보이는군. 훈련 방식을 바꾼다면 중대 전체가 바꿔야지 2소대만 바꿔봤자 의미가 없지. 그런데 김 소위는 우리 중대에서 제일 새내기 소위 아냐? 김 소위가 말해봤자 듣지 않을 거고, 우선 내가 다른 소위 두 명과 캔디 중위에게 잘 설명하면 알아들을 거야. 나머지는 다 대위 진급을 앞둔 고참 중위들인데 아마 안 통할 거다. 캔디 중위가 동참한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지. 다른 중위들은 내가 특별임무를 줘서 마을로 보내 놀다 오게 하지 뭐. 대신 1주 훈련계획서를 4개월 훈련계획서로 바꿔서 다시 보고해. 내가 먼저 보고 괜찮으면 그대로 하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캔디 중위란 알고 보니 어니스트 다나카 중위의 별명이었다. 캔디 중위라는 별명은 그의 부모가 하와이에서 캔디 가게를 한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 자신이 워낙 캔디를 좋아해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캔디 중위는 영옥의 계획에 반대했지만 다른 소위들이 일제히 찬성했다. 영옥은 즉시 훈련계획을 확정해 중대장에게 제출하자 중대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캔디 중위도 훈련이 시작되자 의견을 바꿔 적극적 지지자가 됐다.
매일 아침 정각 8시가 되면 훈련을 시작해 저녁 5시까지 온종일 훈련을 시키면서 훈련내용에 변화를 줬다. 훈련은 최대한 실전 위주로 했다. 모든 병사는 돌아가면서 분대장 역할을 맡게 했고 분대장들은 부소대장이나 소대장 역할, 소대장들은 중대장 역할을 맡게 했다. 고지나 토치카 점령 훈련도 포함됐고 기관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돌격훈련을 할 때는 대대가 갖고 있는 기관총에 공포탄 발사장치가 없어 사단에서 빌려 오기도 했다. 모든 훈련은 신물이 날 정도로 반복시켜 병사들이 조건반사처럼 움직이도록 했다. 각 분대가 일일이 소대장의 이동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1분대가 사격하는 동안 2, 3분대가 이동하고 다시 2분대가 사격하는 동안 1, 3분대가 움직이는 분대별 이동사격 방식도 창안해 훈련했는데 이 방식은 나중에 6·25전쟁 후 미군 당국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됐다.
대대 전체에서 B 중대만 이런 식으로 훈련하다 보니 중대가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됐다. 다른 중대는 갑자기 혹독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 B 중대를 보며 낄낄거렸지만, 영옥은 모진 훈련만이 실전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신념을 갖고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B 중대의 훈련 방식을 혁신한 영옥은 매일 아침 자신의 소대만을 따로 집합시켜 복장상태도 바꾸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전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영옥의 눈에 이들은 영락없는 패잔병이었다. 영옥이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소대원들은 머리도 수염도 항상 단정하게 깎고 군복의 주름도 칼날처럼 잡혀 있고 허리띠 버클이나 군화도 언제나 반짝반짝하는 군인들이었다. 장교후보생학교를 갓 졸업한 신임 소위로서 영옥이 정예군인에 대해 갖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불평을 하면서도 훈련에는 잘 따라오던 병사들도 이 같은 영옥의 설교에는 끝까지 냉담했다. 하와이 농장 출신으로 신발을 신으면 도무지 불편해하는 병사들에게 군화를 닦으라거나 군화 끈을 단단히 매라는 얘기는 공염불이었다. 끈을 매면 정말로 발이 아프다고도 했다. 하와이의 무더위에 허리 밖으로 내놓는 하와이 셔츠가 몸에 밴 병사들은 윗도리를 바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캠프 셸비가 있던 미시시피 강 일대는 더운 데다 습하기까지 했다. 머리나 수염을 깎으라는 말도 우이독경이었다. 3주가 지나가면서 영옥은 병사들의 복장이나 두발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덕분에 영옥은 부임하자마자 몇 가지 별명을 한꺼번에 얻었다.
그중 하나는 ‘여보’였다. 부부가 상대를 부르는 한국어에서 따온 것으로 한국인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극도로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일본계 병사들이 영옥이 계급을 앞세워 불이익을 주지 않을까 염려해 붙인 것이었다. 대대장의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나인티 데이 원더’(90-day wonder)였다. 90일 만의 기적이라는 뜻인 이 별명은 육사나 ROTC 출신이 4년 만에 장교가 되는 데 비해 장교후보생 출신은 3개월 만에 장교가 된다는 점을 빗댄 말이었다.
세 번째는 ‘고통크’(kotonk)였다. 이 말은 속이 빈 코코넛이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빗댄 하와이 원주민의 음성어로 하와이 출신들이 미국 본토 출신은 머리가 비었다며 이들을 놀리는 말이었다. 영옥이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같은 일본계라도 하와이 출신과 본토 출신은 알게 모르게 서로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별명은 ‘지 아이 김’(GI Kim)이었다. 한국말로는 ‘땅개 김 소위’ 쯤 되는 말이었는데 영옥이 워낙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자 붙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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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옥은 모진 훈련만이 실전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신념을 갖고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사진은 훈련소 시절 100 대대 소속 일본계 미군 병사들. |
부대는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 없이 반복되는 기본교육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행군을 나가서는 안락한 장소를 골라 오전 야외강좌를 듣고 잠을 자다가 점심을 먹고 귀대하는 것이 전부였다. 도무지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었다. 부대훈련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교들의 사고방식도 문제였다. 100대대 장교들은 대부분 ROTC 출신이거나 아니면 하와이 방위군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병사들의 제식이나 행군 등 기본훈련에는 익숙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집중적으로 전투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다. 자연히 병사들에 대한 훈련도 실전 중심이 아니라 기본군사교육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대의 백인이나 일본계 장교들은 너무 자부심이 강해 자기들이 전투훈련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영옥은 기타오카와 대화를 끝낸 후 존슨 중대장을 찾아갔다. 중대장은 ROTC 출신으로 역시 하와이 방위군에서 복무하다 100대대에 합류한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영옥은 보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얘기하고 훈련방식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거 아주 괜찮은 생각인데. 그런데 솔직히 나는 보병을 잘 몰라. 나이도 이미 50이 넘어 너무 늙었고…. 그렇지만 이들이 진짜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바꾸긴 바꿔야 하겠는데 어떻게 바꾸지? 선임들은 아무도 자네 생각을 탐탁지 않아 할 거고….”
“제게 복안이 있습니다.”
영옥은 개인 단위의 훈련은 그만 하고 분대, 소대, 중대, 대대 단위의 부대훈련으로 바꿔야 한다면서 주머니에서 다음 1주 동안의 훈련계획서를 꺼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아 보이는군. 훈련 방식을 바꾼다면 중대 전체가 바꿔야지 2소대만 바꿔봤자 의미가 없지. 그런데 김 소위는 우리 중대에서 제일 새내기 소위 아냐? 김 소위가 말해봤자 듣지 않을 거고, 우선 내가 다른 소위 두 명과 캔디 중위에게 잘 설명하면 알아들을 거야. 나머지는 다 대위 진급을 앞둔 고참 중위들인데 아마 안 통할 거다. 캔디 중위가 동참한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지. 다른 중위들은 내가 특별임무를 줘서 마을로 보내 놀다 오게 하지 뭐. 대신 1주 훈련계획서를 4개월 훈련계획서로 바꿔서 다시 보고해. 내가 먼저 보고 괜찮으면 그대로 하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캔디 중위란 알고 보니 어니스트 다나카 중위의 별명이었다. 캔디 중위라는 별명은 그의 부모가 하와이에서 캔디 가게를 한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 자신이 워낙 캔디를 좋아해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캔디 중위는 영옥의 계획에 반대했지만 다른 소위들이 일제히 찬성했다. 영옥은 즉시 훈련계획을 확정해 중대장에게 제출하자 중대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캔디 중위도 훈련이 시작되자 의견을 바꿔 적극적 지지자가 됐다.
매일 아침 정각 8시가 되면 훈련을 시작해 저녁 5시까지 온종일 훈련을 시키면서 훈련내용에 변화를 줬다. 훈련은 최대한 실전 위주로 했다. 모든 병사는 돌아가면서 분대장 역할을 맡게 했고 분대장들은 부소대장이나 소대장 역할, 소대장들은 중대장 역할을 맡게 했다. 고지나 토치카 점령 훈련도 포함됐고 기관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돌격훈련을 할 때는 대대가 갖고 있는 기관총에 공포탄 발사장치가 없어 사단에서 빌려 오기도 했다. 모든 훈련은 신물이 날 정도로 반복시켜 병사들이 조건반사처럼 움직이도록 했다. 각 분대가 일일이 소대장의 이동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1분대가 사격하는 동안 2, 3분대가 이동하고 다시 2분대가 사격하는 동안 1, 3분대가 움직이는 분대별 이동사격 방식도 창안해 훈련했는데 이 방식은 나중에 6·25전쟁 후 미군 당국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됐다.
대대 전체에서 B 중대만 이런 식으로 훈련하다 보니 중대가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됐다. 다른 중대는 갑자기 혹독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 B 중대를 보며 낄낄거렸지만, 영옥은 모진 훈련만이 실전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신념을 갖고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B 중대의 훈련 방식을 혁신한 영옥은 매일 아침 자신의 소대만을 따로 집합시켜 복장상태도 바꾸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전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영옥의 눈에 이들은 영락없는 패잔병이었다. 영옥이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소대원들은 머리도 수염도 항상 단정하게 깎고 군복의 주름도 칼날처럼 잡혀 있고 허리띠 버클이나 군화도 언제나 반짝반짝하는 군인들이었다. 장교후보생학교를 갓 졸업한 신임 소위로서 영옥이 정예군인에 대해 갖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불평을 하면서도 훈련에는 잘 따라오던 병사들도 이 같은 영옥의 설교에는 끝까지 냉담했다. 하와이 농장 출신으로 신발을 신으면 도무지 불편해하는 병사들에게 군화를 닦으라거나 군화 끈을 단단히 매라는 얘기는 공염불이었다. 끈을 매면 정말로 발이 아프다고도 했다. 하와이의 무더위에 허리 밖으로 내놓는 하와이 셔츠가 몸에 밴 병사들은 윗도리를 바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캠프 셸비가 있던 미시시피 강 일대는 더운 데다 습하기까지 했다. 머리나 수염을 깎으라는 말도 우이독경이었다. 3주가 지나가면서 영옥은 병사들의 복장이나 두발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덕분에 영옥은 부임하자마자 몇 가지 별명을 한꺼번에 얻었다.
그중 하나는 ‘여보’였다. 부부가 상대를 부르는 한국어에서 따온 것으로 한국인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극도로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일본계 병사들이 영옥이 계급을 앞세워 불이익을 주지 않을까 염려해 붙인 것이었다. 대대장의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나인티 데이 원더’(90-day wonder)였다. 90일 만의 기적이라는 뜻인 이 별명은 육사나 ROTC 출신이 4년 만에 장교가 되는 데 비해 장교후보생 출신은 3개월 만에 장교가 된다는 점을 빗댄 말이었다.
세 번째는 ‘고통크’(kotonk)였다. 이 말은 속이 빈 코코넛이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빗댄 하와이 원주민의 음성어로 하와이 출신들이 미국 본토 출신은 머리가 비었다며 이들을 놀리는 말이었다. 영옥이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같은 일본계라도 하와이 출신과 본토 출신은 알게 모르게 서로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별명은 ‘지 아이 김’(GI Kim)이었다. 한국말로는 ‘땅개 김 소위’ 쯤 되는 말이었는데 영옥이 워낙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자 붙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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