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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 김영옥 중-중(국방일보)

백전불태 2011. 7. 10. 13:21

영옥, 오른쪽 허벅지 총상 … 야전병원으로 후송 / 2011.02.0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미군 야전병원의 상황도 엉망이었다. 사진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작전지역 일원에 급조된 미군의 제42 야전병원.

 영옥과 부하들의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적군은 땅에 나뒹굴고, 남아 있던 독일군은 모두 두 손을 쳐들고 항복함으로써 전투는 15분 만에 끝났다. 영옥은 포로를 접수하고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부하 서너 명을 데리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때 독일군 병사 한 명이 앞서 도망간 다른 독일군들처럼 동남쪽으로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고 영옥의 부하들이 사격을 가했다. 달아나던 독일군이 총탄을 맞고 두 손을 하늘로 향한 채 뒤로 넘어지면서 그가 들고 있던 슈마이처 기관단총이 영옥 쪽으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죽으면서 손가락이 수축해 들고 있던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이다.

 그 순간 영옥은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누군가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른 야구 방망이에 맞은 느낌이 들고 갑자기 오른발이 매우 무감각해졌다. 총탄이 영옥의 오른쪽 허벅지를 맞힌 것이다. 정신을 차린 영옥이 주저앉은 채 상처를 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영옥은 간단히 지혈조치만 하고 그대로 일어나 언덕을 내려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부하들에게 계속 명령을 내리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있는 포로들을 접수하고 전장을 정리했다.

 영옥은 독일군 부상병들을 평지로 데려와 땅에 눕히도록 했는데 유독 한 병사가 끊임없이 흐느꼈다. 다케바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이 흐느끼는 병사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는 가슴과 배에 총탄을 맞고 계속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다케바 일행이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금발을 쓸어 올려 뒤로 넘겨줬다. 불과 몇 분 전 자기들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지금은 고통을 덜어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병사들이 그의 몸에 야전 담요를 덮어주기 무섭게 담요는 온통 피로 젖어들었다. 그는 몸집은 컸지만, 얼굴은 소년이었다. 그는 무언가 요구하듯 위를 쳐다보며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힘없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영옥이 윗주머니를 뒤지니 가죽 지갑이 나왔다. 안에는 부모의 웃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영옥이 사진을 그의 푸른 눈동자 앞에 대줬으나 그의 눈은 이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영옥 일행은 갑자기 발이 땅에 빨려든 장승처럼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화약 냄새와 침묵만이 살아 이 순간을 머릿속 깊은 곳에 각인시켰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얼굴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보통은 멀리서 움직이는 물체만 보이거나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은 어딘가에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격을 가해 온다. 전장의 병사들은 적군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피와 살이 있고, 두 개의 눈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눈물을 흘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던 영옥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적군 역시 갖가지 비인간적 상황을 고통 속에서 참고 견딘다는 사실이나, 적군도 자기처럼 인내의 한계까지 내몰려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 더 나았다. 영옥이 죽어 가는 적군의 얼굴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때 캔디 중위가 도착했다.

 “우리는 너희 모두 잠든 줄 알았다. 빨리 응급치료소로 가라.”

 캔디는 그 자리에 영옥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곳이 대충 정리되는 것을 보고 떠나겠습니다.”

 영옥은 캔디의 제안을 거절했다. 잠시 후 중화기중대장 잭 미주하 대위가 도착했다. 미주하 대위는 병사들에게 수비대형을 갖추게 하고 기관총을 어디에 배치하라는 등 이것저것 간단히 지시한 다음 영옥에게 말했다.

 “대대장님 명령이다. 응급치료소로 가라.”

 “들것을 가져와라.”

 영옥의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군화 속에 고여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본 캔디 중위가 옆에 있던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영옥은 들것 신세를 지기 싫다면서 등을 돌렸다. 부소대장 다케바와 영옥의 전령 가네코 일병은 멀리 사라지는 영옥의 뒷모습을 굳게 입을 다문 채 지켜봤다. 영옥은 절뚝거리며 걷기도 하고 기기도 하면서 혼자 응급치료소까지 갔다.

 다음 날 아침 영옥이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떠보니 텐트 속이었다. 텐트 안에는 부상자들이 많고 안에 가설된 난로는 불이 꺼져 있었다. 영옥은 일어나 난롯불을 다시 피운 후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다시피 해 텐트 밖으로 나갔다. 그곳은 응급치료소보다 좀 더 후방으로 여러 개의 텐트가 무리를 이룬 임시 병원이었고 간단한 수술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어젯밤 응급치료소에 있다가 앰뷸런스에 실려 옮겨진 기억이 났다. 다시 자기 텐트로 돌아온 영옥이 부상자들을 돌봐주고 있는데 간호장교가 들어오더니 소스라치듯 놀랐다. 간호장교는 영옥을 안다시피 해 침대로 끌고 가 눕히면서 말했다.

 “절대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마세요.”

 간호장교가 나간 후 난롯불이 또 꺼지자 영옥이 일어나 불을 지피는 동안 같은 간호장교가 다시 들어왔다. 그녀가 다시 까무러칠 듯 놀라며 왜 또 일어났느냐고 고함을 질렀는데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생병들이 들것을 들고 뛰어들었다. 위생병들은 영옥을 들것에 눕히더니 밖에 대기 중인 앰뷸런스로 옮겼다. 시동을 건 채 대기 중이던 앰뷸런스는 뒷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야전병원을 향해 내달렸다. 영옥은 여기서 총탄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총탄이 뼈를 다치게 하지 않아 수술은 비교적 가볍게 끝났다.

 나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야전병원에서 내려다보는 지중해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지만 보급은 엉망이었다. 장교는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입원해도 칫솔 치약, 군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기 돈으로 사야 했다. 사병들의 경우는 적십자가 나서서 이런 것들을 돌봐줬지만, 장교들은 제외됐다.

 영옥은 오른쪽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군의관들이 수술하면서 바지를 찢었고, 총상으로 흘러내린 피가 군화까지 적셔 군화도 가위로 절단해 벗겼다. 따라서 성한 피복이라고는 윗도리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병원은 파자마 한 벌과 슬리퍼 한 켤레만 주었을 뿐 칫솔, 치약, 비누에서 군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옥이 구매해야 했다.

 갑자기 전장에서 후송돼 돈도 지갑도 없던 영옥이 적십자에 가서 사정해도 장교는 돌봐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이틀 동안 양치질도 못하고 지낸 영옥의 사정을 알게 된 간호장교의 귀띔으로 구세군에 가서 칫솔, 치약 같은 세면도구는 급한 대로 장만했지만, PX에는 행정반의 연락을 받고 나서나 갈 수 있었다.

 장교들은 병원 행정반에 가서 관등성명을 대면 확인절차를 거쳐 매달 월급의 반까지 받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사병들은 적십자나 구세군에 의존할 뿐 한 푼도 월급을 받을 수 없어 장교들의 적선을 바라거나 심한 경우에는 물건을 훔치기도 해 참으로 문제였다. 적십자나 구세군의 물품만으로는 여러 가지가 부족했다.

 사병들의 실정을 알게 된 영옥은 병원에서 만나는 100대대 병사들에게 자기 월급에서 1~2달러씩 나눠주곤 했다. 연합군은 불과 두 달 전 이탈리아에 상륙해 계속 혈전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야전병원에서도 상황이 어렵기는 장교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야전병원서 첫 번째 무공훈장 `퍼플 하트' 받아 / 2011.02.08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행군하는 일본계 미군 장병들. 처음에는 김영옥을 ‘여보’나
‘땅개 김 소위’ 등으로 부르던 이들은 어느덧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야전병원에서 영옥은 첫 번째 ‘퍼플 하트’(Purple Heart)를 받으면서 훈장행진을 시작했다. 퍼플 하트는 미군이 전투 중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 군인에서부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상을 입은 군인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한 개씩 병원장의 직권으로 주는 훈장이다. 이 때문에 미군들끼리 무공훈장을 따질 때는 넣기도 안 넣기도 하는 훈장이다.

 영옥은 군의관들의 예상보다 회복이 빨랐다. 영옥이 입원 1주일 만에 자꾸 침대에서 일어나 돌아다니자 영옥을 담당했던 간호장교 앤은 붕대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영옥에게 정리하도록 했다. 영옥을 침대에 붙들어 두려는 것이었다. 영옥이 빨리 일을 마치고 또 돌아다니자 앤은 다른 장교들의 붕대 정리도 책임지게 했다. 영옥이 이 일까지 빨리 끝내고 다시 돌아다니자 앤도 결국 포기했다.

 진득이 병원에 붙어 있지 못했던 영옥은 군의관에게 빨리 원대복귀를 시켜 달라고 졸랐고 영옥의 성화에 못 이긴 군의관은 예상보다 회복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과 4주 만에 원대복귀를 허가했다. 영옥은 군의관의 허가가 떨어지자 그 길로 퇴원수속을 마치고 원대 복귀하는 장병이 모이는 임시대기소로 갔다.

 병사들이 영옥을 반겨 맞았다. 이들은 병원에서는 장교 신세도 얼마나 처량한지 잘 안다면서 모자에서 신발까지 일일이 치수를 묻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들은 잠시 후 한꺼번에 다시 나타나 각자 메고 온 더플백을 영옥의 발 앞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더플백은 모두 6개였는데 속에는 모자, 군복, 군화, 내의, 양말에 야전 점퍼까지 가득 담겨 있어 몇 년을 써도 남을 정도였다.

 영옥은 여기서 대대 작전참모 잭 존슨도 만났는데 며칠이 지났지만, 영옥에게도 존슨에게도 원대복귀 지시가 없었다. 알고 보니 임시대기소에서 원대복귀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시간이 길면 2개월이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빈둥빈둥 세월만 죽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영옥은 존슨에게 적당히 여기를 빠져나가자고 제의했다.

 영옥은 이미 임시대기소가 어떻게 장병을 복귀시키는지 유심히 봐둔 터였다. 임시대기소는 매일 아침을 먹고 나면 수송 트럭 몇 대를 줄지어 세워놓고 대기 중인 장병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날 복귀하는 장병의 명단을 들고 계급과 이름을 부르면 당사자가 “네”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각자의 부대 방향으로 배정된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름을 부를 때 자리에 없는 사람도 많았다. 대기소 측은 처음에는 응답자의 계급과 명찰을 명단과 일일이 대조했지만, 마지막쯤 가면 트럭들도 시동을 걸기 시작했고 응답자와 명단을 대조하지도 않았다. 영옥과 존슨은 작정한 대로 다음 날 아침 호명 순서가 마지막에 이르면서 첫 호명에 대답이 없어 다시 부르는 이름이 있을 때 “네” 하며 트럭에 뛰어올랐다.

 영옥이 병원에 있는 동안 부대는 예비대대로 빠져 있었다. 영옥이 부대에 도착하자 능선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던 2소대원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영옥이 부대로 돌아오자 대대 참모를 비롯한 여러 장교와 사병들은 영옥이 은성무공훈장을 받을 것이라면서 은성무공훈장밖에 받지 못하는 것은 마자노 중위 때문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상급부대에서 서훈추천서 제출명령이 내려왔을 때 영옥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던 대대장 길레스피 소령은 위궤양이 너무 심해 이미 해임되고 없었다. 대대장이 영옥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몰랐던 중대장 마자노 중위는 자기한테 보고도 없이 출동한 영옥을 못마땅히 여겨 서훈추천서도 무성의하게 쓰면서 은성무공훈장을 추천했다.

 서훈추천서를 검토한 연대본부가 한 급 높은 특별무공훈장으로 추천서를 고치라고 권했으나 마자노 중위는 이를 거부했다. 연대본부도 어쩔 수 없었고 추천서를 접수한 사단본부가 다시 특별무공훈장으로 고치라고 권했으나 마자노 중위가 끝까지 고집을 피워, 사단본부도 어쩔 수 없이 은성무공훈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서훈추천서는 직속상관이 써야 했다.

 무능하면서도 권위만 앞세우는 것으로 낙인이 찍혔던 마자노 중위는 계속되는 전투로 병력손실이 많은 100대대가 영옥이 입원해 있는 동안 편제를 개편할 때 아예 다른 부대로 전출되고 없었다.

 영옥은 이듬해 2월 실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탈리아 주둔 미군 최고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5군 사령관의 희망에 따라 훈장수여식은 클라크 장군이 직접 주재했다. 이렇게 사선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영옥의 훈장행진은 훗날 한국전쟁까지 계속된다. 


日병사로부터 최대 존경 `사무라이 김' 별명 얻어

영옥은 상황판단이 매우 빨랐고 결코 자신의 영광을 위해 부하를 희생시키지 않았다. 항상 부하의 안전을 먼저 챙겼고 그 때문에 종종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기도 했다. 최일선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전장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가면은 저절로 벗겨지기 마련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나오는 영옥의 진면목은 병사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존경과 신뢰를 심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공포의 와중에서 아무도 결정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할 때 영옥은 언제나 침착하고 조용히 병사들을 이끌었다.

 100대대 장교 모두가 영옥 같지는 않았다. 어떤 백인 장교들은 일본계 병사들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훈련 때는 누구보다 용감했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적에게 노출된 장소에 절대로 있으려 하지 않았다.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병사들은 무례할 정도로 솔직하고 직선적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먼저 챙기는 백인 장교들이 돌격명령을 내리면 본토 미국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피진 영어’로 “네가 가면 나도 간다”고 응수하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일단 어떤 장교를 믿기 시작하면 광신도처럼 복종했다. 영옥도 바뀌어 갔다. 전장이란 모두 비바람과 흙탕물과 땀에 전 누더기 같은 전투복을 입고 빨래는 엄두도 못 내는 곳이었다. 주름 잡힌 바지와 번쩍이는 군화가 군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허식임을 영옥은 알게 됐다. 그런 것은 모두가 무의미한 겉치레였다.

 부대가 전선에 배치되자 장교나 사병이나 모두 함께 하루 24시간 같이 먹고 같이 잤다. 같은 전투식량으로 배를 채웠고 같은 진흙더미를 뒤집어쓰고 잤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장교들은 계급의 특권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영옥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서전이 있었던 이래 바뀌기 시작한 영옥과 병사들의 관계는 전투가 계속될수록 굳어지면서 영옥은 100대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교로 떠올랐다. 영옥 자신은 오랫동안 몰랐지만 이미 일본계 병사들은 이런 영옥을 두고 ‘사무라이 김’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계 병사들 입장에서는 군인에 대해 붙일 수 있는 최대의 존경이 어린 별명이었다.

伊 전선 가장 참혹한 `몬테 카시노 전투' 투입 / 2011.02.09

몬테 카시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사진은 1944년 2월 6일 몬테 카시노
성이 연합군의 포격을 받는 모습으로 성 뒤쪽에 보이는 커다란 산이 몬테 카시노다.

 영옥이 산타 마리아 올리베토 일원에서 있었던 전투로 부상당해 병원에 있는 동안 부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00대대는 편제를 개편해 A, B, C, D, E, F 6개 중대 가운데 E, F 중대를 없애고 중대원들을 나머지 중대로 흡수시켜 보통 대대처럼 4개 중대만 남았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지 2개월밖에 안 됐지만 계속되는 전투로 사상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E, F 중대는 그동안 대부분 예비중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병력 손실이 적었다. 먼저 일선에 투입된 A, B, C, D 중대 가운데 D중대는 중화기중대여서 상대적으로 병력 손실이 적었으나 소총중대였던 A, B, C 중대에는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편제 개편에 따른 인사이동도 있었다. E중대장 미츠 후쿠다가 A중대장이 됐고 F중대장 사카에 다카하시 중위가 B중대장이 됐다. 이 때문에 E중대원들은 A중대로 지원했고 F중대원들은 B중대로 지원해 우선 희망대로 처리되고 그렇지 못한 병사들은 C중대로 배치됐다.

두 달 전투…사상자 많아

 원래 소속됐던 B중대로 돌아온 영옥은 잠시 후 부중대장이 됐는데 이때 인연을 맺은 신임 중대장 다카하시 중위와는 각별한 전우애를 바탕으로 평생을 두고 최고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부대 개편과 함께 대대장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위궤양으로 고생하던 길레스피 소령이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되자 윌리엄 블라이트 소령이 대대장이 됐다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블라이트 소령은 다른 부대로 전출되고 캐스퍼 클로 소령이 신임 대대장이 됐다.

 뉴욕 태생인 클로 소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그러니까 불과 4년 전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1사단 소속으로 이미 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중령 진급도 코앞에 두고 있어 군인으로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 1사단의 다른 연대 소속 부대가 튀니지아의 한 마을로 들어가 민간인들을 무더기로 죽인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격노한 미군 지휘부는 사단장, 사단참모 전원, 연대장과 부연대장 전원, 대대장 전원을 직위해제시켰고, 이 때문에 클로 소령은 대대도 잃고 진급도 보류됐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에 맞춰 100대대를 맡으라는 명령은 클로 소령에게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이었다.

 클로 소령은 아주 뛰어난 장교였고 100대대는 처음으로 야전 지휘관다운 지휘관을 대대장으로 맞았다. 그러나 클로 소령과 100대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전투였다. 북진하는 연합군과 이를 막는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남게 되는 전투였다.

 해가 바뀌어 44년이 되자 영옥의 100대대가 속한 133연대는 미 육군 36사단 소속인 특수부대와 교대하는 임무를 띠고 몬테 카시노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이 특수부대는 미군 50%, 캐나다군 50%로 구성됐는데 몬테 카시노 전투에 투입되자마자 전멸되다시피 해 이름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몬테 카시노로 이동을 하루 앞두고 중대장 다카하시가 영옥을 불렀다.

 “지금 즉시 나폴리 야전병원으로 가서 입원 중인 중대원들에게 월급을 나눠주고 오라.”

 나폴리까지 다녀오려면 전속력으로 달려도 이틀은 걸리는데 부대가 북으로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더구나 지금 투입될 예정인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는 연합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 입원한 부상병들을 돌보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고 염려한 다카하시의 배려였다.

 영옥이 다카하시에게 신고를 하고 지프에 타는 순간 가까운 대대본부에 있던 클로 대대장이 손을 휘저으며 무언가 소리를 치더니 이번에는 무전기에다 고함을 질렀다. 대대장은 무전기로 다카하시를 호출하고 있었다. 다카하시는 자기 무전기에서 대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한 손으로 무전기를 집으며 다른 손으로 영옥을 향해 빨리 떠나라는 제스처를 쓰면서 소리쳤다.

 “가라! 빨리! 무전기에 대답하기 전에 빨리 떠나!”

 바로 다음날 부대를 이동시켜야 하는 대대장은 영옥이 지프에 타는 모습을 보고 영옥이 떠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다카하시의 재촉 속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출발시킨 영옥은 가는 길에 C중대에 들러 중대장 케네스 이튼을 만났다.

 “나폴리 병원으로 가는 길인데 입원해 있는 C중대원들에게 돈을 전해주기 원하십니까?”

 “그러고 싶지만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게다가 방금 대대장님이 무전기로 너를 붙잡으라고 명령하시더군. 우리는 만나지 않은 거야.”

 산 위 독일군과 총격전

영옥 일행은 나폴리에 도착해 병사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이틀 후 밤에 부대로 돌아와 보니 부대는 이미 엊저녁에 몬테 카시노를 향해 이동하고 없었다. 영옥이 그 길로 부대를 찾아 떠나려 하자 남아있던 정비장교 폴 코빈이 곳곳에 적이 득실거리는 데다 너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위험하다며 극구 말렸다.

 다음 날 새벽부터 부대를 찾아 쉬지 않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 영옥은 오후 5시가 돼서야 부대를 만났는데 병사들은 막 참호를 파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부대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후 처음으로 눈이 내렸는데 바람까지 불어 매우 추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바람이 멎어 좀 살 것 같다 싶은데 갑자기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독일군이었다. 양측은 서로 총격을 주고받았다. 아직은 거리가 있었지만 문제는 적이 산 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다카하시가 물었다.

 “이건 무모한 짓입니다. 적은 더 높이 포진한 데다 준비도 잘돼 있고 땅 속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겨울전투 준비도 안 돼 있고 눈까지 내려 미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대로 공격하면 우리는 모두 전멸입니다.”

 “그렇지? 일단 여기 엎드려 사태를 관망하며 움직이는 적이 있으면 총을 쏘라고 해.”

 영옥도 바로 옆에 있는 2소대 병사로부터 얻은 소총으로 총을 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빈정거렸다.

 “무슨 총을 그 따위로 쏘나. 제대로 맞히는 것이 없잖아. 저기 저 독일군 안 보여? 네가 총을 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유작작하잖아?”

 돌아보니 대대장이었다.

 “야, 김 소위. 너, 내 말을 무시하고 나폴리로 가? 대대장 명령을 무시해?”

 “대대장님께 명령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게 우길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건 명령이었다. 너뿐만 아니라 다카하시도 이튼도 다 한통속이었다.”

 “….”

영옥의 명확한 독도법에 대대장 “와! 대단해” / 2011.02.10
1944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포연을 무릅쓰고 돌격하고 있다.

 클로 대대장은 영옥을 바라보며 계속했다.

 “그래, 대대장 명령도 어기고 나폴리까지 갔는데 뭐 중요한 거라도 챙겨 왔나?”

 “대대장님께 중요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중요한 게 있긴 있습니다.”

 영옥은 메고 있던 비상비품 가방을 대대장 앞으로 내밀고 가방을 열었다. 속에는 전투식량이나 비상약 대신 술병 5개가 들어 있었다. 가방을 들여다본 대대장이 빙긋이 웃었다.

 “그 정도 센스가 있으니 다행이군. 그래 병에 든 게 뭐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나폴리에서 믿을 수 있는 게 뭐 있습니까? 그냥 물감을 섞은 물일 수도 있고 휘발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군.”

 “마음에 드시는 것 하나 골라잡으시죠.”

 그 와중에도 대대장은 모든 병을 하나씩 살펴보더니 한 병을 집었다. 백포도주나 보드카쯤 되는지 내용물이 투명했다. 대대장이 마개를 따고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말했다.

포탄 두 발로 위치 확인

 “뭔지 모르겠지만 아주 세군.”

 “50~60도쯤 된다고 우기고 있으니 당연하겠죠.”

 “정말 그쯤 되는 것 같은데. 너도 한 모금 해.”

 영옥이 술병에 입을 댄 순간 대대장이 덧붙였다.

 “조금만 마셔. 이제 그건 내 거야.”

 잠시 후 대대장이 물었다.

 “근데 지금 우리 위치가 어디냐?”

 대대장의 질문에 영옥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지도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 내게 지도가 있긴 있는데 도무지 헷갈린단 말이야. 지도 상에는 이 근처에 산이 7개 있는데 지금 어느 산에 있는지 알 수가 있나. 김 소위, 네가 한번 봐라.”

 대대장이 넘겨주는 지도를 펼쳐든 영옥은 즉시 대대장이 지도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도 상에는 일대에 있는 산이 9개로 돼 있었다.

 “5분만 주시면 위치를 확인하겠습니다.”

 “5분? 오늘 하루는 어차피 이러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필요하면 하루를 다 가져라.”

 잠시 지도를 살피던 영옥이 대대장에게 물었다.

 “포병연락장교를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포병연락장교? 그 친구 저 아래 조금만 내려가면 있을 텐데 불러주지.”

 영옥은 대대장의 지시를 받고 도착한 포병연락장교에게 지도에서 미리 봐둔 좌표를 일러주고 탄착지점 확인용 포탄을 한 발 쏴달라고 부탁했다. 포병연락장교의 연락을 받은 포병대가 포를 쐈지만, 포탄이 어디로 떨어졌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영옥은 옆에서 잠자코 자기를 지켜보는 대대장과 포병연락장교의 눈길을 느끼며 주문을 바꿨다.

 “보통 탄착지점 확인용 포탄은 흰 연기를 뿜는데 지금은 사방이 눈에 덮여 잘 보이지 않으니 다른 포탄을 쏴주십시오.”

 잠시 후 영옥이 읽어준 지점으로 포탄 한 발이 터졌다. 영옥은 다른 좌표를 하나 더 읽어주면서 또 한 발을 쏴 달라고 부탁하자 역시 그 지점에서도 포탄 한 발이 터졌다. 영옥은 대대장 앞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포대의 위치와 방금 포탄이 터진 두 곳을 표시한 다음 자기들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려줬다.

 “야! 대단하군! 정확히 5분 걸렸잖아!”

 대대장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계속했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미친 척하고 대대장 명령을 무시할 배짱도 있고…, 나폴리에서 집어온 물건도 그럴듯하고…, 포병을 동원해 5분 만에 부대 위치까지 읽어냈단 말이지?”

 “….”

 “너한테 대대정보참모를 맡기면 좋겠군.”

 “싫습니다.”

 “뭐?”

 “지금까지 항상 B중대와 함께 있었습니다. 중대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친구 봐라? 야, 너 어디서 임관했어?”

 “포트 베닝 장교후보생학교입니다.”

 “거기서는 군기 교육도 안 시키나?”

 “…?”

 “상관이 희망 사항을 밝히면 그건 곧 명령이야!”

 “그런 것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대대장님의 희망을 밝히신 것 아닙니까? 그건 대대장님 희망이지 제 희망은 아닙니다.”

 “그래, 내 희망이다. 따라서 명령이야. 이미 전투가 시작됐으니까 지금은 B중대 소속으로 그대로 있고 이번 전투만 끝나면 대대본부로 와. 정보참모가 되란 말이야. 이제 알아 듣겠어? 이번에도 미친 척하면 곧장 군법회의다. 알겠나?”

혹한 `또 하나의 적'

 클로 소령은 군법회의까지 입에 담았지만 보일 듯 말 듯 줄곧 웃음을 띠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려가는 대로 즉시 보고드리겠습니다.”

 클로 소령은 날이 어두워지자 공격을 포기하고 부대를 철수시켰다. 밤이 되자 다시 바람이 거세지고 눈발은 계속 흩날리는데 진짜 눈이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눈은 그쳤지만 바람이 세어져 쌓인 눈을 다시 흩뿌리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부대는 철수를 위해 산에서 내려온다고 내려왔지만 바람과 눈이 뒤섞인 어둠 속에서 밤새 헤맸다.

 다음날 동이 튼 다음에 보니 부대는 어제 있던 산이 아닌 또 다른 산에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부대가 썼던 작전지도 자체도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지도에는 분명히 일대에 산이 9개가 있다고 돼 있었으나 실제로 산은 그보다 더 많았다. 산은 모두가 비슷비슷한 높이에 전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거센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탈리아의 겨울 산악은 동복이라고는 한 벌도 없던 100대대에는 또 하나의 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철수에 성공한 100대대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에 들어갔다.

 클로 소령은 이때 영옥을 대대 정보참모로 발령을 냈다. 영옥은 이보다 열흘 앞서 중위로 진급했는데 장교가 된 후 첫 진급이었다. 원래 100대대는 일반 대대와 달리 연대처럼 독립적으로 작전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편성됐기 때문에 부대 규모도 컸고 참모들 계급도 일반 대대보다 대체로 하나씩 높아 작전참모는 소령, 정보참모는 대위가 맡게 돼 있었다. 신참 중위인 영옥에게 이 부대의 정보참모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영옥에 대한 대대장의 신임이 두텁다는 의미였다.

파괴된 수도원 천혜 요새로 … 뜨거운 쟁탈전 / 2011.02.1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저격수.

 그러나 공습은 연합군의 입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무너져 내린 수도원은 이상적인 요새로 변했다. 실제로 수도원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았던 독일군은 공습을 명분 삼아 신속히 수도원을 점령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파괴된 수도원 건물을 은폐물로 이용했고 공습으로 바위에 구멍이 생기면 포대나 기관총 진지로 이용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몬테 카시노 전투에 처음부터 투입돼 혈전을 거듭했던 100대대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00대대의 임무는 몬테 카시노 7부 능선쯤에 세워져 있는 성을 빼앗는 것이었다. 수도원을 중립지대로 선언했던 독일군도 이 성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100대대는 연합군의 공습이 있은 지 사흘 후 다시 공격에 투입됐는데 전투는 4일간 계속되면서 또다시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탈리아 상륙 4개월 만에 병력의 60%를 전사나 부상으로 잃었던 100대대는 약 650명의 병력으로 몬테 카시노 전투에 투입돼 2주 반 만에 잔여병력의 90%를 잃었다. 이제 최전선에 남아 있는 100대대의 병력은 약 60명으로 줄어 있었다. 평균적으로 미 육군 1개 보병중대의 병력은 사병 180명에 장교가 6명이었으나 특수편제였던 100대대는 1개 중대가 사병 200명에 장교는 12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1개 중대라 해봤자 20명에 불과했고 장교는 중대에 따라 한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100대대 병력 10% 남아

 몬테 카시노를 집어삼킨 저승사자는 영옥의 주위도 어슬렁거렸다. 이미 영옥도 여러 번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볼투르노 강의 제방 위에서도 그랬고 산타 마리아 올리베토에서는 두 번이나 그랬다. 몬테 마호에서 다케바가 떠나던 날도 죽음은 얼굴 하나 차이로 비껴갔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저격수는 달랐다. 100대대가 몬테 카시노 전투를 치르던 마지막 날이었다.

 100대대가 엄청난 피해를 무릅쓰고 몬테 카시노 성에 근접한 좁은 산길까지 전진하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15명 정도를 병렬 배치할 공간도 없었다. 2개 분대도 나란히 세우지 못하는 곳에서 성에 들어앉은 적을 상대로 위를 향해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독일군이 성에서 내려 보낸 탱크 2대와 장갑차 1대가 100대대에 의해 파괴돼 성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 위에서 불타며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는 채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영옥의 옆에는 어제 중화기중대장의 부상으로 최일선에 가세한 클라우디 소위가 있었다. 그는 캔사스 주 출신으로 클라우디는 별명이었다. 영옥과 클라우디가 더 이상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병사들을 보며 성의 외곽 돌출부 가까이에 있는 작은 웅덩이로 뛰어들어 바위에 등을 붙이고 기대앉는 순간 성 쪽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단 한 발 날아온 총탄이 가슴을 스치듯 지나가자 둘은 저격수한테 걸려든 것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붙인 채 다리를 앞으로 펴고 상체를 45도 정도 뒤로 젖혀 바위벽에 등을 기댄 상태였는데 아무도 꼼짝할 수 없었다. 저격수는 둘의 오른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성의 돌출부 어딘가에 몸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저격수는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사격을 가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김없이 총탄이 날아왔고 가만히 있으면 정확히 5분 간격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한 발 한 발 울리는 총성은 저승사자의 발걸음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둘의 왼쪽으로 5m쯤 떨어져 있는 클로 대대장 역시 독일군의 총격으로부터 몸을 피하고 있었다. 지형상 클로 대대장은 그래도 영옥이나 클라우디보다는 안전해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대장 너머로 약간 높은 지역에 엎드린 100대대 B, C 중대원들이 저격수를 제거하기 위해 총을 쏘고 있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눈으로 덮인 몬테 카시노에 부는 바람은 참으로 매서운 추위를 실어왔다. 거기다 조금씩 비까지 뿌려 군복도 반은 젖고 반은 얼어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너덧 시간이 흘러가자 이제는 총에 맞아 죽기 전에 얼어 죽을 판이었다. 모든 세상이 이곳에서 멈춘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총탄이 날아오지 않았고 20분이 흘러갔다. 영옥과 클라우디는 미군들이 저격수를 잡은 것 같다고 동의했으나 10분간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역시 총탄은 날아오지 않았다. 둘은 저격수가 죽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 후 일어나기로 했다.

 영옥이 바위에 얼어붙다시피 한 등을 일으켜 세우는데 함께 일어나던 클라우디 소위가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영옥에게 물었다.

 “라이터 있습니까?”

 “응.”

 영옥이 라이터를 꺼내려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기 위해 다시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일었다. 총탄은 상체를 세우고 라이터를 받으려 기다리던 클라우디 소위의 오른 편 머리에 명중해 왼쪽으로 관통했다. 영옥은 클라우디 소위의 머리에서 쏟아지는 피와 골을 뒤집어썼다. 만약 영옥이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몸을 다시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그 총탄은 분명히 먼저 영옥의 머리부터 맞혔을 것이다.

저격수와 악몽의 대치

 클라우디 소위를 잡은 저격수는 영옥까지 잡기 위해 또다시 정기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대로 2시간 30분가량 더 흘렀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영옥은 저격수가 총을 쏜 후 다시 총알을 장전하는 몇 초를 이용해 탈출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클로 대대장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안 돼. 아직 저격수가 버티고 있다. 위험해. 거기서 나오는 데 성공해도 산 아래로 떨어지기 쉬워.”

 저격수가 총을 쏘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총탄이 날아온 후 순발력 있게 일어나 산 아래 쪽으로 몸을 날리며 굴러야 하는데 정확히 몸을 정지시키지 못하면 곧 바로 150m가 넘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영옥은 총탄에 맞은 머리를 자신의 왼쪽 어깨에 기댄 채 죽어가는 클라우디 소위가 내는 신음소리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격수가 다시 총을 쏘기만 기다리던 영옥은 다시 총소리가 나자 용수철처럼 퉁겨 일어나 산 아래 쪽으로 몸을 날리며 굴렀다. 천우신조인 듯 벼랑 끝에서 구르기를 멈춘 영옥은 온몸을 땅바닥에 붙이고 30~40m를 기어 내려왔다.

 그 저격수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때쯤 클로 대대장도 부상을 당했다. 병사들이 저격수를 잡았는지, 저격수가 다른 사람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지 더 이상 영옥에게 총을 쏘지는 않았다.

 

전멸위기 100대대 성 공격 포기 철수 명령 / 2011.02.15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몬테 카시노 성을 공격하는 영국군.


 오후에 연대본부로부터 몬테 카시노 성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대본부는 100대대의 잔존병력만으로는 성을 뺏기는커녕 조만간 대대가 전멸당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막상 철수명령이 떨어졌지만 산 위의 성에 버티고 총을 쏴대는 적에게 등을 보인 채 철수한다는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로 대대장, 미츠 후쿠다, 사카에 다카하시 등 장교란 장교는 대부분 부상을 당해 후송되자 대대본부에 남아 있던 장교를 빼면 몬테 카시노 성 일대에서 싸우고 있던 장교 중에는 A 중대에 유일하게 남아 중대장 역할을 하고 있던 샘 사카모토 중위가 선임자였고 영옥이 차선임자였다. 사카모토도 영옥과 같은 중위였으나 영옥은 막 진급한 신참이었고 사카모토는 2년 전에 진급한 고참이었다. 영옥은 사카모토 중위에게 말했다.

 “사카모토 중위님이 사실상 대대장이십니다. 빨리 잔존 병력을 데리고 대대를 철수시키십시오.”

 “영, 너 지금 제정신이냐. 나는 16~17명밖에 남지 않은 A 중대도 철수시켜야 하고 다른 중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너는 대대 참모니 네가 철수를 책임지고 지휘권을 행사해라. 솔직히 네가 나보다 유능한 군인 아니냐. 지금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나머지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사카모토 중위는 영옥에게 대대를 지휘하라고 종용했다. 사카모토 중위의 제안에 따라 지휘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영옥은 이날 밤늦도록 잔존 병력을 추슬러 무사히 철수를 마쳤다.

 연대본부는 몬테 카시노와 마주 보면서 몬테 카시노보다는 낮은 또 다른 산의 뒤편에 연대 전투지휘소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너무 사상자가 많아 더 이상 대대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100대대는 이 지역으로 후퇴해 예비대대가 됐다.

 현실적으로 이름만 남은 부대로 전락한 100대대로서는 미국 본토에서 훈련 중인 역시 일본계 부대인 육군 442연대로부터 보충병을 받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442연대는 영옥이 장교후보생학교를 마치고 임관한 직후인 1943년 2월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창설된 일본계 부대였다. 100대대가 하와이 출신 일본계 2세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데 반해 442연대는 미국 본토 출신 일본계 2세들을 주축으로 이뤄진 보병부대였다. 미군 지휘부는 100대대의 실적을 봐가며 보다 확대된 규모인 442연대를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계 부대를 확대 편성함으로써 징집연령에 있는 젊은 일본계 이민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100대대가 연대 예비대대가 최전선에서 물러나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영옥에게 연대 전투지휘소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대 전투지휘소라고 해봤자 독일군이 연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바위를 뚫어 속을 비운 후 몬테 카시노 성이 있는 방향으로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드나들 정도로 출입구를 내고 연합군이 공격해 올 방향으로는 기관총좌 3개를 만들어 놓은 매우 비좁은 암석 토치카였다.

 영옥이 전투지휘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몬테 카시노를 향해 오면서 100대대가 건넜던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얼마나 불리한 전투를 해야 했는지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영옥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연대장이 말했다.

 “성에 대한 공격을 영국군이 잇기로 했다. 공격작전 수립을 위해 영국군 참모들이 지형답사를 하고 싶다면서 자기들을 성으로 인도해 달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 중위 너밖에 없다.”

 영국군 장교들을 데리고 다시 성에 갔다 오라는 명령이었다. 연대장이 말하는 영국군이란 인도군의 구르카 부대였다. 구르카 부대는 더 정확히 말하면 네팔인들로 구성된 부대로 장교는 영국군이었으나 부사관과 사병들은 네팔인으로 이뤄진 전통 있는 군대였다. 100대대가 지휘부는 백인 장교로 구성되고 일부 장교와 전체 사병은 일본계 2세로 구성된 것과 비슷했다. 영옥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영국군 중령이 인솔하는 구르카 부대 참모 10여 명과 함께 클라우디 소위의 주검이 있는 몬테 카시노 성을 향해 다시 떠났다.

 야음을 틈타 성으로 갔던 영국군 장교단이 일대를 답사하는 동안 독일군 수색대가 이들을 감지했다. 1개 소대는 되는 것 같은 독일군 수색대는 영국군 장교단을 잡으려고 포위하기 시작했다. 답사할 때 영국군 장교단은 영옥과 위관장교 2명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지휘관인 중령이 있고 그의 뒤를 나머지 장교들이 따라오며 후미를 보호하는 진형을 유지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적이 나타나자 뒤에 있던 위관장교 세 명이 선두그룹에 합류해 자기들 지휘관을 지키기 위해 보호막을 두텁게 했다.

 영옥은 구르카 부대 장교들이 공격을 앞두고 지형답사를 위해 직접 적진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짐작은 했지만, 이 장면을 보고 구르카 부대가 정예군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성을 둘러쌌던 절대의 침묵은 영옥 일행을 잡으려고 외쳐대는 독일어와 이로부터 멀어지려고 속삭이는 다급한 영어로 깨어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의 험준한 몬테 카시노는 아차 하면 그대로 절벽이라 쫓는 자도 쫓기는 자도 뛴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여차 하면 당길 수 있도록 검지를 방아쇠에 갖다 댄 채 권총의 무게를 손등으로 느끼며 두 집단은 경보대회를 하는 시각장애인들처럼 더듬고 움직이고 더듬고 움직이면서 뛰다시피 걸었다. 성 근처에서는 기를 쓰고 추격하던 독일군이 영옥 일행이 미군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산 아래로 가까이 가자 추격을 포기했다.

 일행이 연대 전투지휘소로 무사히 돌아오자 영국군 중령은 옆에 있던 위관장교의 귀에 대고 무언가 짧게 속삭였다. 중령이 말을 마치자 그 위관장교는 급히 밖으로 나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영국제 스카치위스키였다. 중령은 영옥에게 고맙다면서 그 위스키라도 감사의 선물로 받아 달라고 했다. 영옥이 100대대 본부에 돌아와 위스키를 꺼내자 너도나도 한 모금만 마시자며 난리가 났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몬테 카시노도 이탈리아도 독일군도 모두 잊었다.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부대가 없어질 정도로 타격을 입은 100대대가 연대 예비대대가 돼 미국 본토에서 훈련받고 있던 442연대로부터 보충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영옥은 짐 부드리 중위, 이탈리아계 통신장교 프랭크 디마이올로와 병사 대여섯 명과 함께 아폴리노 인근의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영옥이나 병사들이 동양계라 그랬는지 주민들은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곧 이들이 연합군이라는 것을 알고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맞듯 반갑게 맞았다. 연합군 포격이 그들의 집과 마을을 불태우고 파괴한 것을 생각하면 주민의 환대는 놀라울 정도로 극진했다.

연합군 4차례 혈투 … 몬테카시노 수도원 점령 / 2011.02.16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연합군은 1944년 3월 15일 하루에만 20만 발의 포탄을 퍼붓고 수백 대의 폭격기까지 동원했다.
사진은 몬테 카시노에서 죽음을 각오한 채 끝없이 항전하는 독일군.

영옥이 부하들과 함께 아폴리노 인근의 작은 농촌 마을로 들어가자 어디서 배웠는지 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주민 한 명이 일행을 자기 농가로 인도하더니 곧이어 제법 근사한 파티가 벌어졌다. 테이블에는 와인에 치즈에 통닭 요리까지 올라왔다. 와인도 치즈도 전쟁의 와중에서 주민들이 갖고 있는 것 중에는 최고였다.

 “이 농장은 내가 한 20년 미국에 살면서 돈을 모아 고향에 돌아와 산 것이오. 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미국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들이 더욱 반갑소.”

 농부는 부인과 어린 딸과 다른 주민 몇몇과 어깨동무를 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멋진 이탈리아 가곡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식탁에 올라와 있는 통닭이 그 농부가 키우던 마지막 씨암탉이었다.

 “아니, 마지막 씨암탉을 잡다니, 그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당황한 영옥이 물었다.

 “무슨 말씀! 경사 아니오, 경사! 댁들은 우리 농장, 우리 마을, 우리 나라를 해방시켰습니다. 당연히 축하해야지요!”

 “그렇다고 씨암탉까지 잡아요? 닭이 계란을 낳아 또 다른 닭을 얻을 수도 있는데?”

 “아니오, 아니오. 그 닭도 나도 독일군 때문에 비참하게 살았소. 당신들이 피 흘리며 싸워준 덕택에 벗어났소. 당신들의 희생에 비하면 이까짓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오.”

 조촐한 즉석 파티가 끝나고 영옥 일행이 부대로 돌아가려 하자 그 농부와 주민들은 다시 빵이며 와인이며 치즈며 있는 대로 챙겨 나왔다. 영옥 일행은 마을로 들어가면서 보급품으로 나온 담배, 초콜릿, 통조림 같은 것들을 준비해 갔지만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았다. 전쟁으로 피폐한 이탈리아는 가난하고 굶주렸지만 이상하게 생긴 해방자들을 맞은 이탈리아 산골의 주민들은 따뜻하고 순박했다.

안지오에 기습 상륙작전 감행

 원래 연합군은 몬테 카시노에 대한 1차 공세를 시작하면서 구스타프 라인 뒤쪽에 전선을 하나 더 만들어 로마 남쪽을 지키는 독일군 전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안지오에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른바 ‘기와작전’(Operation Shingle)이었다. 기와작전이라는 명칭은 연합군이 2개 전선을 형성하면 지붕에서 기왓장이 떨어져 나가듯 독일군 수비벽이 얇아질 것을 기대하며 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여전히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였다. 두 개의 전선 사이에서 구스타프 라인은 단단히 유지됐고 안지오에 상륙한 연합군도 독일군과 장기 대치에 들어갔다. 연합군 지휘부는 안지오 상륙군을 보강하기 시작했고 100대대도 증원군에 포함시켜 100대대는 일단 나폴리로 철수했다가 안지오로 가게 됐다.

 영옥은 부대와 함께 나폴리로 이동하면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 나오는 그대로 AD79년 비극적인 대폭발로 폼페이를 집어삼켰던 베수비오 화산은 그 후에도 가끔씩 폭발했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영옥은 얼마 전 휴가를 받아 찾았던 폼페이를 떠올렸다. 그때 5일간의 휴가를 받아 나폴리와 소렌토를 방문했던 영옥은 하루를 내 폼페이에 갔었다.

 전쟁 때문이었는지 폼페이는 그때만 해도 개방된 곳이 별로 없어 구경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2000년 전 로마제국의 선진문명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로마제국이 그때 이미 물을 받아 필요에 따라 사용했음을 보여줬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에서는 당시 건물의 호화로움을 알 수 있었다.

 폼페이에서는 많은 사람이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인근 호텔들은 휴가를 얻어 폼페이를 찾는 연합군 장병들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든 영어를 아는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한 푼이라도 팁을 더 받아내기 위해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했으나 전시임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소렌토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폼페이에서도 소렌토에서도 주민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었다. 돈은 리라든 달러든 사실상 구실을 못 했고 미군 군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도 그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담배였다. 이탈리아는 물물경제로 돌아가 있었고 담배가 가장 효율적인 거래수단이었다.

 미군들에게 담배는 충분히 있었다. 정기 보급품인 담배는 언제나 지급되지만 부대가 전선에 있는 동안엔 전달이 어려워 비교적 후방에 있는 보급창고에 그대로 쌓였다. 그래 봤자 대대나 중대의 간이식당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 차이는 커다란 것이었다. 병사들은 최전선 전투식량으로 나오는 K레션에 들어있는 몇 개비 담배로 때우다가 부대가 최전선을 벗어나거나 개인적으로 휴가를 받아 영문을 나설 때 보급창고에 들러 담배를 받아 나갔다.

 소렌토를 찾은 영옥은 당시 소렌토에서 가장 좋다는 빅토리아 호텔에 묵었다. 역시 연합군 장병들이 가장 큰 고객이었던 이곳 호텔에는 커다란 연회장이 하나 있어 매일 밤 이곳에서 음악회를 곁들인 연회가 열렸는데 이곳에서 전화를 피하고 있던 유명한 이탈리아 성악가 두 명이 이 음악회에서 공연을 했다.

 이탈리아 어디나 일감이 없었고 두 성악가도 이 공연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영옥은 나폴리 야전병원이나 다른 곳에서 여러 이탈리아 가곡을 들었지만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들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노래를 불러서였는지 참으로 슬프고 아름다웠다. 음악회가 끝난 후 영옥이 담배 두 보루를 챙겨 성악가 몫으로 지배인에게 맡길 때까지도 노래의 여운은 귓전을 맴돌았다.

 나폴리로 이동한 영옥의 부대는 3월 말 안지오에 상륙했다. 몬테 카시노 전투는 100대대가 철수한 다음에도 2개월이나 더 계속됐다. 연합군은 수도원에 또다시 대규모 공습과 포격을 실시했다. 3월 15일에는 수백 대의 폭격기가 동원됐고 포탄만 20만 발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독일군은 폐허 속에서 끝없는 항전을 계속했고 연합군은 4차 공세 끝에 드디어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점령했다.

獨 부상자 수십 명만 남아 있어
 그렇지만 몬테 카시노를 지키던 독일군이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안지오에서 영옥이 독일군 포로를 잡기 위해 목숨 건 도박에 나서던 5월 16일 저녁, 독일군 지휘부는 더 이상 몬테 카시노를 지키다가는 퇴로가 끊길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철수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독일군은 영국군과 폴란드군 수색대와 조우하며 철수하기 시작했고 18일 폴란드군이 수도원에 진입했을 때는 심한 중상으로 후송조차 될 수 없던 부상자 수십 명만 남아 있었다.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던 100대대는 ‘퍼플 하트 대대’(Purple Heart Battalion)라는 별명을 얻었다.

연합군, 로마 북쪽 65㎞ 지점까지 파죽지세 북상 / 2011.02.1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서 행군 중인 일본계 미군 장병들.

 로마를 함락시킨 연합군은 독일군에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북상을 계속했고 영옥의 부대도 이탈리아 서안 해변도로를 끼고 치비타베키아를 향해 북으로 올라갔다. 치비타베키아는 로마 북쪽 약 65㎞ 지점에 있는 항구도시다. 밤낮없이 강행군한 100대대가 치비타베키아 동쪽 산악지대에 이를 무렵 어둠이 깔리고 비까지 내리자 행군을 멈추고 야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면서 판초를 뒤집어쓴 영옥이 잠에 곯아떨어지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싱글스 대대장이었다.

 “442연대가 오늘 밤 12시에 치비타베키아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442연대를 인도해 와야겠다.”

 “대대장님,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 사흘 동안 대여섯 시간밖에 못 잤습니다. 우리 부대에는 장교가 25명이 넘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 밤중에 치비타베키아로 오는 442연대의 도착지점에 정확히 가서 그들을 실수 없이 데려올 사람은 너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 벌써 11시 20분이야.”

 442연대는 역시 일본계 2세로 이뤄진 연대였다. 100대대가 이탈리아에서 용감히 싸워 충성심을 입증하자 100대대를 흡수하는 상급부대로서 442연대를 이탈리아에 투입한 것이었다.

 운전병 역시 지리를 몰랐기 때문에 영옥은 치비타베키아로 내려가는 지프 안에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자정이 임박해 약속장소에 도착한 영옥이 차에서 내려 442연대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약 1시간 30분을 보낸 영옥은 운전병에게 교차로에서 잘 보이는 곳으로 차를 약간 옮기게 한 후 차 안에서 잠들었다. 얼마 후 누군가 다시 영옥을 흔들어 깨웠다.

 “이봐 중위, 귀관이 100대대에서 마중 나온 장교 맞나?”

 “네.”

 “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맞습니다.”

 “그런데 차 안에 자빠져 있어?”

 “지금 몇 시입니까?”

 “새벽 4시다.”

 “연대가 도착하기로 돼 있던 시각이 자정 아닌가요?”

 “길을 잃어 좀 늦었다.”

 “그렇습니까? 저는 정각 12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저기서 기다렸습니다.”

 “그래? 야, 너 말이야, 만약 내가 네 지프를 보지 못해 지나쳤다면 우리는 지금 독일군의 포로가 됐을 수 있다는 거 몰라?”

 “누구십니까?”

 “442연대 부연대장 버질 밀러 중령이다.”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포로 운운은 지나친 과장이십니다.”

 “뭐야?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여기와 적군 사이에는 아군 34사단 2개 연대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제 차를 보지 못해 그냥 지나쳤어도 적군을 만나기 전에 아군을 먼저 만났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너 지금 약삭빠르게 변명하는 거야?”

 “….”

 “….”

 “연대는 다 왔습니까?”

 “그렇다.”

 “어쨌든 그만 연대로 가시죠.”

 차에서 내린 영옥이 밀러 중령과 함께 행군을 멈추고 있던 연대로 가자 젊은 위관 장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 떠날 준비가 됐습니까?”

 영옥이 한 마디 던지자 누군가 야유성 답변을 보내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준비가 돼 있었다. 너희 부대 이야기는 잘 들었는데 우리는 너희보다 준비가 더 잘 돼 있단 말이야. 너희에게 전투란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러 왔다는 말이야.”

 영옥은 말하는 젊은 장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사선을 넘나들며 보낸 시간이 이미 9개월이고 그 사이 우리는 이탈리아 주둔군을 통틀어 최정예 부대가 됐다. 그런데 이제 훈련소를 갓 나온 자들이 우리에게 전투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왔단 말이지? 이 친구들, 갈 길이 멀군….’

 영옥은 연대를 인도해 100대대 야영지로 데리고 왔다. 그 사이 대대는 참호를 파고 텐트 설치까지 마쳤고 442연대가 도착하면 안내할 인원들까지 정해져 있었다. 영옥이 연대를 인계하자 누군가 영옥에게 어느 텐트로 가라고 일러줬다. 텐트는 웬만한 호텔방 크기였는데 영옥이 들어가자 싱글스 대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이미 동이 트기 시작했는데 영옥을 반겨 맞은 대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영, 너 부연대장한테 깊은 첫인상을 남겼더군. 연대장한테도 마찬가지고.”

 싱글스 대대장과 밀러 부연대장은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피곤하니 눈부터 좀 붙여야겠습니다.”

 “그래 좀 자라. 저기 있는 야전침대를 쓰면 되겠다.”

 피곤에 찌든 영옥은 쓰러지듯 침대에 등을 붙이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 10시였고 배도 고팠는데 멀지 않은 곳에 대대 급식소가 마련돼 있었다. 급식소는 제법 형식도 갖춰 간이 식탁과 벤치 비슷한 것들도 준비돼 있었다. 영옥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급식소 바로 앞까지 지프 한 대가 달려오더니 멈춰 섰다. 연대장 펜스 대령의 지프였다. 연대장이 나타나는 것을 본 싱글스 대대장이 즉시 자기 텐트에서 나와 연대장에게 경례했고 지프에서 내린 펜스 대령은 싱글스 중령과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둘의 몸짓을 보니 연대장은 자꾸 급식소 쪽으로 오려고 했고 대대장은 그를 자꾸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연대장이 영옥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안 싱글스 대대장이 급식소에서 영옥이 아침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연대장이 급식소로 오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결국, 연대장은 급식소로 왔고 영옥은 일어나지도 않고 경례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아침을 먹었다. 그런 영옥에게 연대장이 힐난하듯 말했다.

 “김 중위, 지금 뭐 하나?”

 “아침 먹고 있습니다.”

 “지금 아침을 먹다니 좀 늦은 거 아냐?”

 “어젯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들어서 알고 있다. 다음부터는 아침 식사를 제시간에 하도록.”

 “….”

 펜스 대령이 돌아간 후 싱글스 중령이 영옥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영, 아까는 네가 일어나 경례도 하고 예의를 갖췄어야 했다. 싹싹하게 행동하는 것도 좀 배워라.”

 “대대장님, 우리가 하루가 멀다고 피 흘리며 전투를 계속한 지 벌써 9개월이고 저는 피곤해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연대장이라 해도 그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영옥이 심드렁하게 답하자 대대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타일렀다.

 “영, 너는 아주 보기 드문 불세출의 군인이다. 나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3대째 군인이다. 그렇지만 군인으로서 자질을 따진다면 내 몸 전체에 있는 것보다 네 손가락 하나에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아무리 그래도 평시에 군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좀 배우는 게 좋겠다.”

 

20대 미녀와 5일간 달콤한 `로마의 로맨스' / 2011.02.24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 경제는 말이 아니었고 국민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피난민들.

 다카하시 역시 다른 장교 한 명과 함께 영옥보다 먼저 로마로 ‘알 앤 알’을 나와 있었는데 영옥이 로마로 떠나기 전에 엑셀시오르 호텔로 연락해 자신의 도착을 알리자 다카하시 대위가 스탠드바에서 만나자고 했던 터였다.

 몇십 명만으로도 꽉 찰 것 같은 스탠드바는 이삼백 명은 족히 돼 보이는 군인과 여자로 발 디딜 틈 없이 왁자지껄했다. 담배연기나 저마다 질러대는 고성은 그렇다 쳐도 술을 사려는 군인들이 겹겹이 바를 둘러싸고 밀치고 당겨 바텐더에게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웠다. 계급이나 체면을 차리다가는 술 한 잔 얻어먹기도 어려운 판이었다. 먼저 와 있던 다카하시 일행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영옥 일행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이 ‘알 앤 알’ 마지막 날인 다카하시는 꼭 로마에서 영옥과 술 한잔 같이 해야겠다며 영옥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옥 일행의 합류로 네 명으로 불어난 이들은 위스키 잔을 부딪치며 로마에서의 해후를 즐겼다. 평소 과묵한 다카하시도 이날만큼은 흥이 돋았는지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와 함께 로마에서는 이렇게는 해도 되지만 저렇게는 하면 안 된다는 등 일장 훈시를 늘어놨다.

다카하시와 해후 즐겨

 영옥이 미소를 머금은 채 다카하시의 열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주위가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은 일행이 주위를 둘러보니 바 입구에 금발의 미녀가 서 있었다. 영옥 일행의 테이블이 입구에서 멀기도 한 데다 서양인이라 정확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얼핏 보기에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이 백인 여성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좌중을 압도할 만했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으면서 영옥도 내심 참으로 미녀라 생각하며 다카하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다카하시의 이야기에 묻혀 있던 영옥은 갑자기 누군가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 바 입구에 서 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대위님,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영옥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갑자기 말문을 닫은 채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다카하시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성을 인도해 밖으로 나갔다.

 둘이 호텔 로비의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녀는 영옥에게 물었다.

 “언제 로마에 오셨습니까?”

 “방금 도착하는 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대위님이 오케이 하신다면 앞으로 5일간 함께 지내겠습니다.”

 “….”

 체류기간을 묻지도 않은 그녀가 영옥의 ‘알 앤 알’이 5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봐서 그녀가 이렇게 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영옥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전쟁통에 가족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문은 이탈리아의 명가입니다. 아무렇게나 같이 지낼 수는 없습니다. 조건이 몇 가지 있는데 약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조건이라니…?”

 “첫째, 저는 대위님과 함께 있는 닷새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대위님도 저와 함께 있는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서는 안 됩니다. 둘째, 저는 외박을 할 수 없습니다. 매일 아침 10시에 왔다가 밤 10시에 돌아가겠습니다. 셋째, 아침에 호텔로 올 때는 어머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올 것입니다. 대위님은 항상 호텔 정문 앞에서 저를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제가 도착하면 예의를 갖춰 저를 맞아주시고 저를 에스코트해서 호텔 안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

 “넷째, 하루 세끼 식사를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식사 때 남은 빵과 음식은 집으로 가져가겠습니다. 만일 다른 커플과 함께 식사하게 되면 남은 빵과 음식은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나누겠습니다. 이 밖에 적당한 사례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주시면 감사히 받겠지만 제가 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아는 가족은 어머니밖에 없으니 이 점도 유념해 주십시오.”

 “….”

 “….”

 “바에는 다른 군인들도 많고 나는 동양인인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시오?”

 “다른 사람들은 다 왁자지껄했지만, 대위님만은 조용히 얘기를 들으면서 간간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일단 약속하면 반드시 지킬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얘기는 여자로서는 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비굴하지도 않았고 말하는 태도에서도 분명히 명가의 교육을 받은 기품이 배어 있었다. 영옥이 스탠드바로 다시 돌아오자 다카하시 대위가 으르렁거렸다.

5일후 지프에 몸 싣고…

 “나는 닷새 동안 여기 있으면서 그 여자에게 잠깐만이라도 같이 있어 주면 담배를 한 보루나 주겠다고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너는 어떻게 했기에 오자마자 저쪽에서 먼저 난리냐?”

 넷은 한참을 같이 웃다가 일어섰고 다카하시 일행은 부대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어제 말한 대로 정각 10시가 되자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영옥이 그녀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자 웨이터는 둘을 8인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영옥이 웨이터에게 담배 두 갑을 주면서 한 갑은 웨이터 것이고 한 갑은 보스 것이라며 빵이든 설탕이든 떨어지면 채워주고 서비스가 좋으면 담배를 한 갑씩 더 주겠다고 하자 웨이터는 빵이며 설탕이며 잼이며 무엇이든 떨어지기만 하면 계속 날라 왔다. 영문을 모르는 손님들의 시선이 영옥의 테이블로 집중됐지만, 웨이터는 무엇인가를 담은 쟁반을 들고 계속 들락거렸고 같이 있던 여성 넷은 아예 테이블 모서리에 가방을 벌리고 갖다 댄 채 식품을 쓸어 넣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 경제는 그만큼 말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일자리란 말은 그 자체가 사치였다. 전국 어디를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이란 특히 여성들에게는 지옥이었다. 전쟁 중에 이렇게 가족의 생계를 구한 여성들을 기다리는 또 다른 비극은 전쟁이 끝나고 먹고살 만해지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5일 후 영옥이 아직도 담배와 초콜릿으로 가득한 더플백을 통째로 주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너무 많다며 사양했다. 영옥은 행운은 빈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호텔 정문에 대기하고 있는 지프에 몸을 실었다.

 

노르망디 상륙 성공 연합군 본격 독일군 압박 / 2011.02.25

1944년 이탈리아에서 100대대가 연대 예비대대가 되자 김영옥(앞줄 오른쪽에서 둘째) 대위가 다른 대대 참모들과 함께
100대대를 이끌고 바다(Vada)로 행군하고 있다.

 사세타 전투가 있던 날 펜스 대령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돌아갔지만, 그가 사세타 전투에 열광했던 이유는 비단 전투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참 후 영옥이 91사단에서 들은 얘기였지만 이날 영옥이 전투 지시를 내릴 때 펜스 대령은 대대장 옆에서 무전기를 통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정보참모로서 영옥이 사용한 무전기는 대대장과 중대장들에게 교신할 수 있던 것으로 영옥이 어느 중대장과 교신하면 대대장이나 다른 중대장들이 같이 들을 수 있었다. 펜스 대령이 대대본부에 와 있었기 때문에 영옥과 중대장들의 교신을 그대로 들을 수 있었는데 그때 대대본부에 있던 손님들도 같이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91사단 참모장과 연대장 한 명이었다.

 당시 5군사령부는 새 사단이 이탈리아로 오면 실전에 앞서 반드시 모든 연대장과 사단본부 핵심장교들이 이탈리아에 먼저 와 있던 다른 부대의 실전을 참관토록 했다. 이때는 91사단이 막 이탈리아에 도착한 터여서 442연대의 실전을 참관하게 됐고 연대장은 100대대의 전투를 참관하도록 했다.

도노빈 대령 파격 제안

 영옥은 나중에 91사단이 레그호른을 점령한 후 클라크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100대대가 수비대로 선발돼 그곳에 갔을 때 91사단 참모장 조세프 도노빈 대령으로부터 이 얘기를 듣게 됐다.

 “김 대위가 사세타 전투를 지휘하던 날 나도 100대대 본부에서 귀관이 무전기를 통해 중대장들에게 내리는 작전지시를 낱낱이 들었다. 그 일은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앞으로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김 대위를 우리 사단에 보내달라고 상부에 요청할 계획인데 그때 나의 요청을 존중해 주기 바란다. 김 대위가 우리 사단으로 와 준다면 사단 정보참모 자리를 주겠으며, 귀관이 신참 대위라는 것도 알지만 중령으로 진급시켜 주겠다.”

 사단 정보참모는 중령 보직이었는데 이제 막 대위를 단 유색인에게 이 자리와 중령 진급을 보장하겠다는 도노빈 대령의 제의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색인 그것도 아시아계가 중령이 된다는 것은 꿈꾸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100대대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도노빈 대령과의 만남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영옥은 이 제안을 금방 잊었다.

 로마 함락에 이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독일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도 미군이 서부전선을 맡고 영국군이 동부전선을 맡은 상태 그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북상을 계속해 아르노(Arno) 강을 눈앞에 두게 됐다.

 아르노 강은 이탈리아 반도를 동서로 횡단하는 강이었고 연합군의 도강작전은 전 전선에서 일제히 이뤄질 계획이었다. 독일군은 로마를 내주고 북으로 물러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후퇴해 2차 주방어선인 ‘고딕 라인’에서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승패는 결국 고딕 라인을 깨뜨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고 이를 위해 연합군은 먼저 아르노 강을 건너야 했다.

 미 5군사령부는 서부전선을 다시 둘로 나눠 서쪽 반을 4군단에 배정했다. 4군단은 도강작전을 앞두고 대형 특수임무 부대인 ‘태스크포스 45’를 편성하고 영옥의 100대대도 여기 배속시키면서 서부전선이 시작되는 아드리아 해 연안부터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고도 피사의 동쪽까지 태스크포스 45에 맡겼다.

 태스크포스 45는 미군, 영국군, 브라질군, 자유 이탈리아군 등으로 이뤄졌는데 핵심 주축은 미 육군 45 방공포여단이었다. 45 방공포여단은 태스크포스 출범에 맞춰 보병여단으로 급조돼 여단장 폴 러틀릿지 준장에서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보병에 대해서는 깡통이었다. 방공포부대가 보병부대로 바뀐 것은 원래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할 때 독일 공군을 염려해 방공포 부대를 대거 준비했지만, 전황이 바뀌면서 독일이 이탈리아에서 공군을 동원하는 빈도가 극감해 방공포병의 수요는 줄어든 대신 계속되는 전쟁으로 특히 보병 사상자가 늘면서 보병의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늘만 쳐다보면서 아무 일도 안 했던 방공포병들이 달포의 훈련에 믿을 만한 보병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었다. 4군단이 태스크포스를 만들면서 100대대를 포함시킨 것도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군단은 100대대와 함께 92사단 소속 370연대도 태스크포스에 배속시켰다. 이탈리아에 막 도착한 92사단은 사단장을 포함한 고급 장교는 백인이지만 초급 장교와 병사는 흑인인 흑인부대였다.

 러틀릿지 준장은 태스크포스 전력의 핵심인 영옥의 부대를 방공포여단과 흑인 연대의 중간에 배치했다. 아르노 강이 피사 바로 동남쪽을 끼고 굽이치는 지점이었다. 4군단은 태스크포스를 만들면서 경탱크 중대, 중탱크 중대, 야포 대대, 박격포 중대 등도 배속시켰는데 러틀릿지 준장은 보병에 대해서는 모른다며 이들 다수를 100대대에 맡겼다. 자연히 영옥의 부대는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두 부대 사이에 샌드위치가 된 채 도강작전의 핵심이 됐다. 이 같은 사실은 작전참모로서 영옥이 또다시 막중한 책임을 안게 됐다는 의미였다.

 지도를 앞에 놓은 영옥은 깊고 오랜 침묵의 세계로 들어갔다.

영옥, 새 작전 구사 골몰

 ‘우리 목표는 우선 아르노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를 발판으로 피사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사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곳 아닌가? 피사에 대한 직접 공격 없이 강을 건너 피사를 점령할 수는 없을까?’

 ‘현지 독일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심리는 전장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요소다. 우리가 아르노 강 남쪽에 배치되기 전까지는 독일군이 강을 건너 미군 진영을 몇 ㎞나 뚫고 정찰대를 보내왔으나 우리가 배치되는 즉시 이를 봉쇄하면서 거꾸로 강 건너 독일군 진영을 몇 ㎞나 뚫고 정찰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새로 출현한 상대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독일군이 정보망을 제대로 가동해 새로 출현한 상대가 이미 이탈리아에서 명성이 자자한 100대대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독일군의 병참문제다. 로마함락 후 독일군의 대응이 확실히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로마해방 전까지는 우리가 공격하면 독일군은 있는 대로 야포를 동원해 포격을 가해 왔고 전투 중에는 끝까지 그렇게 했으나 로마 해방 후에는 동원되는 야포 수도 적어졌고 포격 강도도 줄었다. 포탄을 아끼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로마함락이 가져온 심리적 타격 때문보다는 로마함락 직후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병참문제는 더 악화됐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따라 독일군으로서는 프랑스로 공격해 들어가는 연합군을 저지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이탈리아 주둔군에게 탄약을 보급하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틀 후 영옥은 지금까지 100대대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마음먹고 싱글스 대대장을 찾아갔다.

 

영옥의 기막힌 `가짜작전'에 독일군 놀아나다 / 2011.02.28
1944년 8월 29일 이탈리아에서 미 육군 598포병대대가 아르노 강 도강작전을 위해 105㎜ 곡사포를 퍼붓고 있다.

 영옥은 정보참모 제임스 부드리, 통신참모 프랭크 디마이올로, 포병연락장교 찰스 파이블먼만 배석한 가운데 싱글스 대대장에게 작전개요를 브리핑했다.

 영옥의 작전은 먼저 가짜 도강작전을 두 번 한 다음 진짜 도강작전을 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허허실실 작전이었다. 싱글스 대대장은 브리핑이 끝나자 무릎을 치면서 영옥의 작전을 허가했다. 가짜 도강작전에 이은 진짜 도강작전이라는 개념을 일단 갖고 나면 생각은 쉬운 일이었으나 실제로 어려운 점은 정확히 어떤 부대를 언제 어떻게 동원하느냐 하는 것과 세부사항을 문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영옥은 대대 참모와 중대장 전원을 소집해 세부 작전을 수립하고 문서로 만들었다. 가짜 도강작전인 만큼 독일군의 눈을 속이는 일에 세심한 배려가 이뤄졌다.

도상훈련 수차례 반복

 작전의 요지는 D-day 나흘 전에 가짜 도강작전을 한 번 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가짜 작전을 한 번 더 한 후 바로 다음날 그 장소에서 똑같은 시각에 진짜 작전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가짜 작전의 목적은 독일군의 탄약을 소진해 진짜 작전 때 독일군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이었고 혹시 진짜 작전을 가짜로 오판하면 일은 훨씬 더 쉬워질 수 있었다. 가짜 작전을 위해 야포, 탱크, 박격포, 기관총, 연막탄 등 모든 것을 진짜 작전처럼 동원하되 보병 규모만 축소했다.

 작전을 벌일 시간과 장소도 정해졌다. 군사적으로 볼 때 지형상 진짜 도강작전을 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타치니뿐이었다. 100대대가 배치된 곳에서 아르노 강은 알파벳의 ‘U’자처럼 흐르고 있었고 타치니는 U자의 아래 부분 남쪽에 있는 강변 마을이었다.

 한강이 서울을 관통하듯 아르노 강은 피사를 동서로 관통한 다음에는 남북으로 두 번씩 방향을 바꾸며 굽이치다가 타치니를 스치듯 지나는데 타치니에 이르면서 강폭도 커지고 수심도 얕아졌다. 덕분에 가장 깊은 곳이 병사들의 가슴에 차는 정도였고 강바닥에는 작은 바위들까지 쌓여 있어 부교를 설치하지 않고도 보병들이 무기를 물에 적시지 않은 채 도강할 수 있었다. 게다가 탱크까지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강의 흐름이 U자 모양이기 때문에 강의 남쪽을 장악하는 쪽이 강의 바로 북쪽 그러니까 U자의 안쪽 지대를 모두 영향권 안에 둬 독일군으로서도 이곳까지 수비대를 주둔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단 강을 건너기만 하면 그다음 운신도 비교적 수월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100대대가 포진한 아르노 강 남쪽은 이렇다 할 산이 없는 반면 독일군은 험준한 몬테 피사노에 들어앉아 있었고 이곳의 준봉으로 해발 897m나 되는 몬테 세라에 본진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이 개시될 경우 미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할 수 있었다.

 모든 작전계획이 수립되고 문서로 만드는 과정까지 끝나자 영옥은 포병연락장교, 탱크중대장, 중화기중대장, 보병중대장들을 모두 참석시켜 도상훈련을 수차례 반복시켰다. 이 단계부터 태스크포스 사령관인 러틀릿지 준장도 싱글스 대대장과 함께 작전회의에 참석했다. 보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하며 100대대에 전권을 주고 모든 것을 일임하는 방식으로 선명한 리더십을 보였던 러틀릿지 장군은 영옥의 브리핑을 묵묵히 들으면서 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을 아끼는 대신 100대대가 예하 중대나 다른 각 부대와 어떻게 그렇게 효율적으로 교신할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스크포스 45는 본부와 각 예하 부대의 통신조차 쉽지 않은 정도였다.

 가짜 작전 첫날 아침 7시 야포 108문이 포문을 열면서 1차 가짜 작전이 실시됐다. 포격은 진짜 도강을 하듯 시시각각 강도를 더해 10여 분 계속됐다. 처음 강 너머로 집중되던 포격은 점차 북으로 움직였고 독일군 관측소가 있던 고지들에도 엄청난 포격이 가해졌다. 관측소 일원에 포격을 집중시킨 것은 독일군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때문에 포격이 관측소 방향으로 가해질 때는 연막탄도 집중적으로 살포했다. 초반에 가짜 작전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날의 핵심이었다. 포격이 북으로 움직이는 순간에 맞춰 탱크 약 30대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날씨가 건조해 먼지가 쉽게 일었기 때문에 영옥은 탱크 중대장에게 최대한 먼지를 많이 일으키도록 미리 주지시켰다. 역시 독일군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같은 목적으로 트럭도 있는 대로 동원했다.

 1차 작전이 실시되자 예상대로 독일군은 엄청난 포격을 가해왔다. 이틀 후 2차 작전이 실시되자 독일군은 또 포격을 가해왔지만 역시 예상대로 포격 강도가 눈에 띄게 줄었고 1차 작전 때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였다.

 9월 1일 막상 진짜 작전이 실시됐을 때 독일군은 이번에도 가짜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포탄이 바닥났는지 단 한 발의 포격도 총격도 가해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영옥의 부대는 도강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30분 만인 아침 7시 30분 선두가 이미 아르노 강을 건너고 있었고 8시에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전원 아르노 강 북쪽에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때 독일군은 이미 수비를 포기하고 이 지점 수비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다음 목표인 `피사'로

 영옥의 부대가 강을 건너자 아르노 강은 갑자기 가을이 온 듯 울긋불긋 화려한 색깔로 뒤덮였다. 많은 병사가 아르노 강 남쪽의 이탈리아 마을에서 우연히 찾은 옷 공장에서 한 벌씩 챙긴 옷을 군복 위에 그대로 입고 작전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마을은 셔츠·옷·신발 등 이탈리아의 명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는데 연합군이 북상하면서 전투가 임박해지자 주민들이 황급히 피난 간 듯 모든 제품이 그대로 공장에 쌓여 있었다. 하와이 출신인 병사들은 실크나 면화로 만들어진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이탈리아 셔츠가 하와이의 알로하 셔츠를 연상시킨다며 기념으로 한 벌씩 집었는데 진짜 도강작전이 실시되자 만약 전사하면 고향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있고 싶었는지 병사들은 네 명 중 한 명은 이 셔츠를 입고 있는 듯했다.

 영옥이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는 도강작전이 알로하 셔츠가 가져다준 행운이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싱글스 대대장을 쳐다보자 대대장도 말없이 미소를 머금고 부대를 진군시키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강을 건넌 100대대는 피사를 배후에서 포위하기 위해 피사를 왼쪽으로 끼고 그대로 북쪽으로 행군을 계속하다가 비아 도메니치를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9시쯤 피사 북쪽 레팔라찌네 부근에 도착했다. 이때 태스크포스 본부로부터 다른 부대들이 아직 도강하지 못했으니 12시까지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대기명령을 내린 싱글스 대대장이 영옥의 옆에서 피사를 바라보며 “보름 동안 이번 공격을 준비하면서 피사가 얼마나 유서 깊은 도시인지 말도 많이 했는데 감회가 새롭다”며 중얼거렸다. 대대장은 아르노 강 도강작전을 앞두고 부대가 피사 동남쪽에 배치되자 “목표는 피사”라면서 영옥에게 피사의 사탑이 어떻고 피사대성당이 어떻고 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듯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곤 했다.

 

1944년 25세였던 김영옥은 자기가 세운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사를 무혈해방시킨
후 문자 그대로 연합군 최선봉으로 피사에 입성, 피사의 사탑에 올랐다. 사진은 전후
 피사의 사탑과 피사대성당 모습.

 “피사는 토스카나에 있는 고도로 11세기 때는 제노바·베네치아와 함께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 번영하기도 했으며, 이후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이름을 날린 곳으로….”

 대대장은 역사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전쟁 전에 세계여행도 많이 해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았다. 대대장의 중얼거림을 들은 영옥이 “피사의 사탑이나 구경 가시자”고 하자 대대장도 기다렸다는 듯 영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12시까지 기다리려면 2시간 반이나 더 있어야 했고 피사는 코앞에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피사의 사탑을 보러 간다고 하자 포병연락장교 찰스 파이블먼을 포함해 너도나도 가겠다고 술렁였다. 적군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 몇 명만 피사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위험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더구나 병사들 사이에는 영옥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는 미신 같은 것이 퍼져 있던 터였다. 대대장은 정보참모 부드리와 통신참모 디마이올로를 불러 “만일에 대비해 통신병들을 데려 가니 상황이 생기면 즉시 연락하라”면서 통신병 등 6명만 따라나서도록 했다.

 대대장의 지프와 영옥의 지프에 분승한 일행은 피사로 내달렸다. 영옥이 싱글스 대대장과 함께 문자 그대로 연합군의 최선봉에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피사를 해방시키는 순간이었다. 가을의 문턱을 밟고 선 북이탈리아는 하늘도 날씨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피사는 텅 비어 있었다. 독일군은 아르노 강을 건너려는 연합군을 막기 위해 전부 강 인근에 배치된 것 같았고 주민들은 모두 피란을 떠난 듯 강아지 한 마리 구경하기도 어려운 채 곳곳에서 탐스럽게 영근 살구·자두·복숭아 같은 과일들만이 피사를 지키고 있었다. 독일군이 피사에 없는 것은 어쩌면 유적 보호를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옥 역시 도강작전을 구상하면서 피사를 직접 공격하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제외했다. 그렇지만 로마 공방전 때와 달리 독일군은 이번에는 피사를 중립도시로 선언하는 조치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군을 의식한 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차를 모는 운전병 옆에서 대대장은 신이 난 듯 예의 미술사 강의를 다시 늘어놨다.

 “전에도 말했지만 피사의 사탑이란 두오모 디 피사(피사대성당)의 부속건물로 피사가 중세 도시국가 시절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종탑인데….”

 평소 말을 아끼는 대대장이었지만 이때만은 예외였다. 대대장의 뒷좌석에 탄 채 관광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을 계속하는 대대장의 설명을 듣던 영옥도 피사의 사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사탑에 바짝 차를 댄 일행은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기울어진 사탑의 꼭대기가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가늠해 본다며 부산을 떨기도 했다. 영옥도 일행에 섞여 발걸음과 눈대중으로 사탑의 기울기를 측정해 보기도 하고 1만4500톤이나 되는 무거운 대리석탑이 10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로 600년이라는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경이를 되새기기도 하면서 대대장과 함께 사탑 속에 나선형으로 난 294개의 계단을 따라 종루까지 올라갔다.

 영옥은 기울어진 종루에서 다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피사 출신의 세계적 물리학자 갈릴레오가 바로 그곳에서 쇠 공으로 자유낙하실험을 했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지면까지 거리를 눈으로 재보기도 하고 멀리 눈을 들어보기도 했다. 피사의 사탑은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했지만 높이는 55.8m로 사실상 그리 높지는 않아 종루라고 해 봤자 아드리아 해도 볼 수 없었고 바로 북쪽에 있는 병사들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영옥이 보지 못한 것에는 자기 자신도 있었다. 스물다섯이던 영옥은 자기가 세운 작전에 따라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부대를 이끌고 아르노 강을 건너 문자 그대로 연합군 최선봉으로 피사를 해방한 후 피사의 사탑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이 순간 독일군은 아르노 강을 사이에 두고 아직도 강을 건너지 못한 태스크포스 45의 다른 부대들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독일군 상급 사령부는 영옥의 부대가 이미 아르노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겠지만, 현재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고 다른 부대들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독일군은 영옥의 부대가 이미 강을 건너 자기들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사탑 구경을 마친 영옥 일행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히는 피사대성당까지 돌아보고 10시 30분쯤 부대로 돌아갔다. 12시가 지났는데도 다른 부대가 도강하지 못하자 대기명령은 계속 연장됐다. 몇 시간 후 독일군은 영옥의 부대가 벌써 강을 건너 피사 북쪽까지 와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곧 밤도 되기 때문인 듯 피사를 포기하기로 한 듯했고 이 같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4군단으로부터 오후 4시쯤 100대대에 이동명령이 내려왔다. 독일군은 마음만 먹었다면 100대대와 일전을 벌일 수 있었으나 피사를 의식해서인지 깨끗이 철수했다.

 피사 점령을 다른 부대에 맡긴 채 영옥의 부대가 다음 목표인 세르치오 강을 향해 다시 서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다시 부대를 정지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왼쪽의 방공포여단과 오른쪽의 흑인 연대가 아직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으니 간격이 너무 벌어진다는 이유였다. 흑인 연대는 이때쯤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방공포여단은 이로부터 1시간이 더 지나서야 강을 건넜다.

 100대대가 세르치오 강에 도착하자 또다시 명령이 하달됐다. 그러나 이번 명령은 단순한 행군정지 명령이 아니었다. 이번 명령은 이날 자정 100대대가 세르치오 강을 떠나 다음 날 아침 9시 배편으로 나폴리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영옥의 부대가 세르치오 강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밤 9시쯤 러틀릿지 준장이 대대본부를 방문했다. 100대대를 놔줘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서운했던 러틀릿지 장군은 대대 참모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 앞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싱글스 대대장에게 말했다.

 “태스크포스 45는 덩치만 컸지 믿을 만한 보병부대는 100대대 하나뿐이었는데 100대대가 여단을 떠난다니 참으로 섭섭하고 막막하다.” 러틀릿지 장군은 영옥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김 대위를 우리 여단에 붙잡아 둘 수 있겠나? 만일 귀관이 우리 여단으로 와 준다면 즉시 소령으로 진급시켜 주겠다.”

 러틀릿지 장군은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싱글스 대대장을 향해 이의가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 이의가 없으며 모든 것은 김 대위의 선택입니다. 그가 여단에 남겠다면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해 줄 것이나 100대대를 선택한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것도 사실입니다.”

 싱글스 중령이 대답을 마치자 러틀릿지 장군은 영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영옥의 선택이 말해야 할 순간이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저는 100대대와 함께 나폴리로 가겠습니다.”

 곧 알게 될 일이었지만 나폴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영옥의 부대가 1년 동안 계속된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뒤로하고 프랑스 전선으로 투입되는 것을 의미했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39>피사의 사탑 ⑶
영옥 `무혈입성' 피사의 사탑 올라 감회 젖어 / 2011.03.02

1944년 25세였던 김영옥은 자기가 세운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사를 무혈해방시킨
후 문자 그대로 연합군 최선봉으로 피사에 입성, 피사의 사탑에 올랐다. 사진은 전후
 피사의 사탑과 피사대성당 모습.

 “피사는 토스카나에 있는 고도로 11세기 때는 제노바·베네치아와 함께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 번영하기도 했으며, 이후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이름을 날린 곳으로….”

 대대장은 역사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전쟁 전에 세계여행도 많이 해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았다. 대대장의 중얼거림을 들은 영옥이 “피사의 사탑이나 구경 가시자”고 하자 대대장도 기다렸다는 듯 영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12시까지 기다리려면 2시간 반이나 더 있어야 했고 피사는 코앞에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피사의 사탑을 보러 간다고 하자 포병연락장교 찰스 파이블먼을 포함해 너도나도 가겠다고 술렁였다. 적군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 몇 명만 피사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위험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더구나 병사들 사이에는 영옥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는 미신 같은 것이 퍼져 있던 터였다. 대대장은 정보참모 부드리와 통신참모 디마이올로를 불러 “만일에 대비해 통신병들을 데려 가니 상황이 생기면 즉시 연락하라”면서 통신병 등 6명만 따라나서도록 했다.

 대대장의 지프와 영옥의 지프에 분승한 일행은 피사로 내달렸다. 영옥이 싱글스 대대장과 함께 문자 그대로 연합군의 최선봉에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피사를 해방시키는 순간이었다. 가을의 문턱을 밟고 선 북이탈리아는 하늘도 날씨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피사는 텅 비어 있었다. 독일군은 아르노 강을 건너려는 연합군을 막기 위해 전부 강 인근에 배치된 것 같았고 주민들은 모두 피란을 떠난 듯 강아지 한 마리 구경하기도 어려운 채 곳곳에서 탐스럽게 영근 살구·자두·복숭아 같은 과일들만이 피사를 지키고 있었다. 독일군이 피사에 없는 것은 어쩌면 유적 보호를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옥 역시 도강작전을 구상하면서 피사를 직접 공격하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제외했다. 그렇지만 로마 공방전 때와 달리 독일군은 이번에는 피사를 중립도시로 선언하는 조치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군을 의식한 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차를 모는 운전병 옆에서 대대장은 신이 난 듯 예의 미술사 강의를 다시 늘어놨다.

 “전에도 말했지만 피사의 사탑이란 두오모 디 피사(피사대성당)의 부속건물로 피사가 중세 도시국가 시절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종탑인데….”

 평소 말을 아끼는 대대장이었지만 이때만은 예외였다. 대대장의 뒷좌석에 탄 채 관광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을 계속하는 대대장의 설명을 듣던 영옥도 피사의 사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사탑에 바짝 차를 댄 일행은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기울어진 사탑의 꼭대기가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가늠해 본다며 부산을 떨기도 했다. 영옥도 일행에 섞여 발걸음과 눈대중으로 사탑의 기울기를 측정해 보기도 하고 1만4500톤이나 되는 무거운 대리석탑이 10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로 600년이라는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경이를 되새기기도 하면서 대대장과 함께 사탑 속에 나선형으로 난 294개의 계단을 따라 종루까지 올라갔다.

 영옥은 기울어진 종루에서 다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피사 출신의 세계적 물리학자 갈릴레오가 바로 그곳에서 쇠 공으로 자유낙하실험을 했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지면까지 거리를 눈으로 재보기도 하고 멀리 눈을 들어보기도 했다. 피사의 사탑은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했지만 높이는 55.8m로 사실상 그리 높지는 않아 종루라고 해 봤자 아드리아 해도 볼 수 없었고 바로 북쪽에 있는 병사들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영옥이 보지 못한 것에는 자기 자신도 있었다. 스물다섯이던 영옥은 자기가 세운 작전에 따라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부대를 이끌고 아르노 강을 건너 문자 그대로 연합군 최선봉으로 피사를 해방한 후 피사의 사탑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이 순간 독일군은 아르노 강을 사이에 두고 아직도 강을 건너지 못한 태스크포스 45의 다른 부대들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독일군 상급 사령부는 영옥의 부대가 이미 아르노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겠지만, 현재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고 다른 부대들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독일군은 영옥의 부대가 이미 강을 건너 자기들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사탑 구경을 마친 영옥 일행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히는 피사대성당까지 돌아보고 10시 30분쯤 부대로 돌아갔다. 12시가 지났는데도 다른 부대가 도강하지 못하자 대기명령은 계속 연장됐다. 몇 시간 후 독일군은 영옥의 부대가 벌써 강을 건너 피사 북쪽까지 와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곧 밤도 되기 때문인 듯 피사를 포기하기로 한 듯했고 이 같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4군단으로부터 오후 4시쯤 100대대에 이동명령이 내려왔다. 독일군은 마음만 먹었다면 100대대와 일전을 벌일 수 있었으나 피사를 의식해서인지 깨끗이 철수했다.

 피사 점령을 다른 부대에 맡긴 채 영옥의 부대가 다음 목표인 세르치오 강을 향해 다시 서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다시 부대를 정지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왼쪽의 방공포여단과 오른쪽의 흑인 연대가 아직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으니 간격이 너무 벌어진다는 이유였다. 흑인 연대는 이때쯤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방공포여단은 이로부터 1시간이 더 지나서야 강을 건넜다.

 100대대가 세르치오 강에 도착하자 또다시 명령이 하달됐다. 그러나 이번 명령은 단순한 행군정지 명령이 아니었다. 이번 명령은 이날 자정 100대대가 세르치오 강을 떠나 다음 날 아침 9시 배편으로 나폴리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영옥의 부대가 세르치오 강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밤 9시쯤 러틀릿지 준장이 대대본부를 방문했다. 100대대를 놔줘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서운했던 러틀릿지 장군은 대대 참모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 앞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싱글스 대대장에게 말했다.

 “태스크포스 45는 덩치만 컸지 믿을 만한 보병부대는 100대대 하나뿐이었는데 100대대가 여단을 떠난다니 참으로 섭섭하고 막막하다.” 러틀릿지 장군은 영옥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김 대위를 우리 여단에 붙잡아 둘 수 있겠나? 만일 귀관이 우리 여단으로 와 준다면 즉시 소령으로 진급시켜 주겠다.”

 러틀릿지 장군은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싱글스 대대장을 향해 이의가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 이의가 없으며 모든 것은 김 대위의 선택입니다. 그가 여단에 남겠다면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해 줄 것이나 100대대를 선택한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것도 사실입니다.”

 싱글스 중령이 대답을 마치자 러틀릿지 장군은 영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영옥의 선택이 말해야 할 순간이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저는 100대대와 함께 나폴리로 가겠습니다.”

 곧 알게 될 일이었지만 나폴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영옥의 부대가 1년 동안 계속된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뒤로하고 프랑스 전선으로 투입되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