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이끌어가는 한국 인물

철강왕 박태준(월간 중앙 2012월 1월호 이필재님의 기사를 옮기다)

백전불태 2012. 5. 12. 09:10

 

<월간중앙> 2012년 1월호
 
[삶과 추억] ‘철강왕’ 박태준(1927~2011)
독재의 사슬도,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라
 
이필재 경영전문기자 jelpj@joongang.co.kr
 
‘포항제철의 기적’ 일군 한국 산업화 세력의 주역… ‘DJT연합’으로 수평적 정권교체에도 기여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2월 13일 영면했다.
흉막 섬유종이 그를 덮쳤다. 향년 84세. 또 하나의 거인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다.
한국인은 동시대의 영웅과 참 원로를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박태준은 군인, 기업인, 정치인으로서 치열하게 살다 갔다. 1990년 11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철강산업에 끼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보내왔다. 박태준이 정치에 뛰어들어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있을 때였다. 미테랑은 축사에서 박태준을 이렇게 치하했다.

“당신은 한국이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맨 앞에 서 있었습니다. 군대를 필요로 하자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기업인을 찾았을 때 당신은 기업인이 됐습니다.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됐습니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삶에서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박태준은 한국전쟁 당시 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은 뛰어난 장교였다. 직업군인이 된 건 해방공간에 자신의 전공을 살려 취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그의 가족은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1927년생인 그가 여섯 살 때였다. 명문 사립 와세다대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해방 후 귀국선에 올라탔다. 공학도로서 들어갈 직장이 마땅치 않자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한다. 거기서 그는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건설을 그에게 맡긴 박정희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박정희는 정작 5·16을 일으키면서 박태준을 배제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국가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 국가적으로는 우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 군을 제대로 이끌어갈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개인적으로는 내가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 내 처자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어.”

이 말을 마친 박정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고 한다. ‘보스’의 무한신뢰에 박태준은 콧등이 시큰했다고 회고했다.
1963년 박태준은 정치에 참여하라는 박정희의 요청을 거절하고 소장으로 예편한다.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그는 41세에 포항제철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69년 박정희는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서서 예비역 장성들을 지지성명에 끌어들였다. 박태준은 그러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이렇게 내뱉었다고 한다.
“원래 그런 친구야.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내버려둬.”

이듬해 2월 박정희는 박태준을 찾았다.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 진척상황을 보고받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받고서 그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포철 1기 설비 구매에 쓸 대일 청구권 자금은 한·일 정부 간 협정에 따른 것이라 포철이 직접 쓸 수 없었다. 상업차관 역시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어 포철은 설비 구매의 주체로 나설 수 없었다. 정부 기관인 주일 구매소는 승인권을 내세워 포철이 선정한 업체를 거부했다. 공급업체에서 상납을 받으려는 정치인까지 끼어들었다.

박정희는 참모들을 물리치고 박태준에게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느냐”고 물었다. 박태준은 설비 구매의 난관에 대해 설명하고 개선 방안을 건의했다. 심각한 표정의 박정희가 메모지를 내밀었다.

“임자,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봐.”
그가 건넨 메모지를 받아 든 박정희는 왼쪽 위 여백에 서명을 하더니 도로 내밀었다.
“임자에게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쉽지 않을 테니 갖고 가.”
불과 몇 달 전 ‘3선 개헌 지지서명’을 거부한 박태준은 가슴이 찡했다. 박정희가 친필 서명한 이 메모지는 포스코 사사에서 ‘종이 마패’(131쪽 사진)라 불린다.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DJT 연대의 세 축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왼쪽에서 둘째), 김종필 전 자민련 명예총재(왼쪽), 박태준 자민련 총재. 1997년 12월 19일 김 대통령 당선자가 일산 자택으로 두 사람을 초청했다.

‘보스’였던 박정희와도 줄다리기
박태준은 포철의 회사 형태를 놓고 박정희와 줄다리기도 했다. “손실이 나더라도 정부가 보전해줄 수 있는 국영기업으로 하라”는 박정희에게 그는 “경영진의 자세가 안일해지고 장차 철강을 수출할 때 외국 정부의 이런저런 규제에 부딪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결국 그의 뜻에 따라 포철은 정부가 지배주주인 상법상 회사로 출범했다. 이로써 포스코의 해외 진출을 가로막을 뻔한 걸림돌이 제거됐다.

1992년 10월 2일 광양제철소 4기 설비 준공식이 열렸다. 25년에 걸친 포철 건설의 대역사가 마무리된 것이다. 이튿날 박태준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묘 앞에 섰다. 자신은 경부고속도로를 책임질 테니 제철소를 맡으라던 그였다.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그는 임무 완수를 보고한 이 일을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장면이라고 회고했다. 포철 1기 공사에 투입된 자금만도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세 배가 넘었다.
기업인 박태준은 포스코를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박태준이 포스코에 재직할 당시 만들어졌고 지금도 포항제철소 구내 곳곳에 걸려 있는 표어다. 일관제철소 건설은 자유당 정부 시절 이래 다섯 번이나 시도됐지만 번번이 무산됐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언론도 회의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업인 가운데 그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도 한국에서 제철소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도 메이지 시대에 시작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나 성공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걱정이 된 이병철 회장이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당대 최고의 경제인에게서 인정받고 싶었던 박태준은 이 회장에게 장장 1시간 20분에 걸쳐 포철의 경영현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이 일화에 대해 2008년 1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말씀해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재무구조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삼성도 포철 이상 빚이 있고, 현대는 아마 삼성보다 빚이 더 많을 것’이라면서…. 그렇게 인정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자부심도 생겼죠.”

1969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내용의 한국 경제 보고서를 내놓았다. 박태준이 포철 1기 건설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였다. 이 보고서 때문에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기업들로 구성된 대한국제차관단(KISA)의 차관이 무산됐다. 그는 대일 청구권 자금의 잔여금을 포철 건설에 전용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관철시켰다.

1986년 박태준은 런던 출장길에 17년 전 IBRD 보고서를 쓴 J 자페 박사를 만났다. 그 보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물음에 자페는 “지금 보고서를 쓰더라도 결론은 같을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박태준이라는 변수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잘못 예측한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철강왕 박태준은 살아서 이미 신화가 된 영웅이다. 포항제철소는 일본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졌다. 1978년 여름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중국에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신일본제철 측에 요청했다.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본제철 회장은 이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철소는 사람이 짓습니다.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포철은 기적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덩샤오핑은 “그렇다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1987년 작고한 이나야마는 생전에 박태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 후 “중국이 당신을 납치할지 모른다”고 조크했다.

박태준은 아버지뻘이었던 이나야마와 국적과 세대를 뛰어넘어 깊은 유대를 맺었다. 이나야마는 일본 사회에서 천황보다도 존경받는 기업인이었다. 그와 함께 차로 이동할 때 박태준은 미리 익혀둔 일본 유행가의 가사를 적어주면서 개인 교습을 했다. “일본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영혼을 얻었다”고 박태준은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포스코엔 우향우(右向右) 정신이 살아 있다. 우향우 정신은 1968년 박태준이 포항제철소 건설을 밀어붙일 때 한 말에서 비롯됐다. 영일만의 모래벌판에 포항제철소를 지을 당시 어느 날 그는 전 사원을 집합시켰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이 투입된 공사였다. 비장한 심정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겁니다. 우리 목숨 걸고 일합시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저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읍시다.”



포철 1기 설비 구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에게 준 ‘종이마패’. 박태준이 작성한 메모로 왼쪽 위에 박정희의 친필 사인이 있다.

훗날 그는 “그 시절 인격조차 벗어 던진 채 직원들을 호되게 조련했다”고 회고했다. 발전 송풍설비 공사 현장을 둘러보다 80%가량 진행된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을 시공이 부실하다고 폭파시킨 적도 있다. 이 일로 일본인 감독에게 “여기 소풍 나왔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2006년 가을 포스코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을 취재하러 기자가 포항제철소를 찾았을 때 배진찬 당시 파이넥스 2공장장은 “파이넥스 공장엔 우향우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했다.

살아서 신화가 된 영웅
‘꿈의 기술’로 불리는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포스코에 권한 사람도 박태준이다. 1992년 정계에 몸담고 있던 그는 포스코에 “고로(용광로) 없이 쇠를 만드는 신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권유했다. 21세기엔 환경 문제로 고로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선견이었다.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까지 쇳물은 고로에서만 뽑아냈다. 14세기 이래 고로 방식은 제철공법의 대명사였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포스코는 마침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언론은 “자체 기술로 개발한 이 공법은 지난 100년 간 사용해온 용광로를 대체하는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보도했다.

1992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 <포철의 경영 성공사례>는 ‘박태준의 탁월한 지도력’을 포철 성공의 가장 주된 요인으로 꼽았다. ‘철의 사나이’ 박태준은 포스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실상 이음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군 출신 기업인으로 그는 몸에 밴 규율과 기업가적 창조성을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월간중앙>은 2008년 초 오피니언 리더 100명을 대상으로 서베이를 해 ‘건국 60돌 한국의 상징’을 선정했다. 박태준은 이 서베이에서 한국 경제계의 두 거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에 이어 경제인 상징 3위에 뽑혔다. 포스코를 떠난 지 15년, 정치에 투신해 총리까지 지냈지만 사람들은 그를 걸출한 경제인으로 기억했다.

박태준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1970년 가을의 일이다. 보험회사에서 리베이트라면서 6000만원을 그에게 들고 왔다. 제철소의 고가 설비에 대해 보험을 든 대가였다. 그는 이 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집권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내놓으라는 압력을 받던 차 통치자금으로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마음대로 쓰라”며 그 자리에서 돈을 돌려주었다.

박태준은 이 돈으로 재단법인 제철장학회를 만들고 각급 학교를 하나하나 세워나갔다. KAIST와 수위를 다투는 명문 POSTECH(포항공대)도 그렇게 해서 설립됐다. 교수를 뽑기 위해 그는 뉴욕으로, 시카고로 직접 날아갔다. 생전에 그는 주변에 기업인이나 정치인보다 교육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치인 박태준은 영욕을 맛보았다. 박정희의 요청도 거절했던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박정희 서거 후 정치의 외풍에 시달릴 뻔한 포철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서였다. 초선 의원 시절 재무위원장을 맡고 집권당 대표까지 지낸 그는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해외에서 망명객이나 다름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 후 고희의 나이에 포항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재기했고,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대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는 총리가 됐지만 단명했다. 생전의 그는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언론에 ‘내 생애 최대의 실수는 TJ(박태준)가 아니라 YS(김영삼)를 대통령 후보로 민 것이다. 나는 색맹이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보복과 배신이 횡행하는 정치판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산업화 세력의 주역이었지만 보수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 1997년 DJT 연대의 한 축이었던 그는 수평적인 정권 교체의 일익을 담당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대선 후보였던 DJ에게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는 “당신을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며 “당신은 진짜 어떤 색깔인가”라고 물었다. 산업화의 상징적 존재였던 그가 DJ와 손을 잡으면서 DJ에 대한 색깔론 공세는 힘을 잃었다. 그에 앞서 그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역설했다. 박정희의 충직한 부하였지만 후세에 “독재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고,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라”고 주장했다.
공인으로서 정도 걸어
그의 좌우명은 네 가지였다.
“무엇이든 세계 최고가 되자”, “절대적 절망은 없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10년 후의 자기 모습을 설계하라”.
박태준은 10년 후를 내다보는 혜안과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절망적인 난관을 뚫고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기업을 일으켰다. 우리 시대 위인의 반열에 들 만한 위업을 남긴 것이다. 그는 또 일찍이 사원용 사택과 교육기관에 대대적인 투자를 한 선각이었다. 그가 연수원을 만드는 것을 보고 삼성도 연수원을 지었다.

우리 현대사에 경제와 정치 두 분야에서 정점에 서 본 사람은 그 말고는 없다. 그는 공인으로서 정도를 걸었다. 산업화 세력의 주역이었지만 부패하지 않았다. 포스코의 창설자였지만 퇴직금도 챙기지 않았다. 포스코의 주식을 한 주도 보유한 일이 없다. 생전의 그는 “남에게 비판받을 일은 평생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언행은 사회 원로로서의 위엄이 있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를 몸으로 실천한 그는 신혼 초 부인 장옥자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나라에 바친 몸이니 집안 살림은 알아서 하시오.”
한 달여 전 왼쪽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하기 전 그는 부인에게 “평생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했다. “포스코 창업 1세대 가운데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유족 측은 “그가 큰딸 집에 얹혀 살았고 본인 명의의 집도 주식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40년 간 살았던 북아현동 집을 팔고 집값 전액인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12월 14일에 찾은 그의 빈소에 놓인 위패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정치 낭인으로 지내던 시절 그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이대환이 쓴 박태준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에필로그에서 박태준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의 원산쯤에 포스코의 제3 제철소를 짓고 싶습니다. 돈은 포스코의 국제신인도로 마련하고, 북한 군인 1000명쯤 뽑아 포항·광양에서 훈련시키면 됩니다. 포스코엔 역전의 노병이 많아요.”

제철보국의 지경을 한반도로까지 넓히겠다는 원대한 비전이었다. 1970년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한보다 철강 생산량이 월등히 많았다. 그런데 이제 역전의 노병을 지휘해야 할 그가 타계하고 없다.

10년 전 그는 30년 간 폐를 압박한 물혹을 수술로 들어냈다. 3.2㎏이나 되는 물혹에서 모래의 주성분인 규사가 덩어리로 나왔다. 이번에 왼쪽 폐에서도 규사 성분이 검출됐다. 그와 교유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제철소 건설 현장인 바닷가를 누비는 동안 잔 모래가 폐에 침투한 것”이라며 “이 나라를 위해 막장의 탄부처럼 살다 가셨다”고 말했다.

4년 전 <월간중앙>과의 인터뷰 때 기자는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으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쓰지 말라고 하겠다”고 답했다. 지금 인터넷은 고인을 추모하는 열기로 뜨겁다.

그가 꿈꿨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과제다. 그는 생전에 “역사는 저절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갈 것인가?

故 박태준

1927년 부산시 기장 출생. 일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중퇴,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임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 대한중석 사장, 포항종합제철 사장·회장. 민정당 대표, 민자당 최고위원, 대한민국 32대 국무총리

무엇이 사람을 위대하고 거룩하게 하는가에 대해 답을 주는 구절입니다. 

 

유족 측은 “그가 큰딸 집에 얹혀 살았고 본인 명의의 집도 주식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40년 간 살았던 북아현동 집을 팔고 집값 전액인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사익이 아닌 국익을 위해 헌신하고 죽는날까지 사욕을 부리지 않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실로 위대한 인물로 요금 세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