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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가 무엇이기에 대통령의 리더십과 연관해 논란을 일으킬까. 실용주의는 어쩌면 이념의 반대말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탄생한 실용주의는 이념보다는 유용성·효율성·실제성을 강조한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기업 정신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법·예술·종교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실용주의는 특히 시장경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 철학이다. 시장경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바뀔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는 ‘마음이 바뀌는 사람들을 위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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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의 아버지는 현대심리학의 아버지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1842~1912)다.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제임스와 더불어 실용주의의 공동 창시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1839~1914)다. 퍼스의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명료하게 할 것인가”라는 1878년 논문에서 실용주의의 윤곽이 나왔다. 퍼스의 실용주의에 영감을 준 개념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제임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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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는
경험주의·합리주의 양 진영의 철학자들이 일치를 이루는 방법으로 제임스가 제시한 것은 관념의 차이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실용적인 차이로 나타날 것인지를 따져 보는 것이다. 실용적인 차이가 없다면 관념의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쓸데없는(idle)’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에 실용적인 가치가 없다면 시간 낭비다. 자유의지냐 결정론(決定論·determinism)이냐의 문제로 다투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제임스는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개혁과 같은 효과를 실용주의를 통해 철학에서 거둘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제임스에 따르면 이러한 ‘실용적 방법(practical method)’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실용주의는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로크·버클리·흄이 사용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유부단한 인간은 불쌍한 인간
제임스가 보기에 실용주의 등장 이전까지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를 찾기 위해 끝이 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해 왔다. 진리는 인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인류가 그 진리를 발견하건 발견하지 못하건 진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제임스에게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만드는 것’이었다. 무엇으로 진리를 만들 것인가. 아이디어였다. 제임스에 따르면 아이디어는 사건(event)이라는 검증 과정을 통해 진리가 된다. 제임스는 “아이디어가 진리가 되는 것은 사건을 통해서다”고 주장했다.
진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실천주의·행동주의이기도 했다. 제임스는
진리가 그 무엇보다 인간의 실천에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고 제임스가 믿은 이유는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82)의 영향이기도 했다. 1875년에 쓴 편지에서 제임스는 “진정한 인간 과학이 진화론을 바탕으로 건설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임스는 생존에 도움을 주느냐 주지 못하느냐에 따라 어떤 아이디어의 유용성이 판가름 난다고 생각했다.
실용주의의 탄생으로 미국은 세계 철학계에 비로소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이를 가능케 하는 데 핵심적인 공헌을 한 것은 제임스였다. 그래서 “위대한 제임스가 하버드대에서 34년이나 가르쳤기 때문에 19세기 말, 20세기 초 하버드대가 위대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20여 년간 미국 철학계에서 군림한 실용주의는 1950년대 들어와 쇠퇴의 길을 걸었다. 쇠퇴의 원인은 얄궂게도 ‘아이디어는 생존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제임스의 인식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옳았기 때문이다. 1949년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했다. 미·소 냉전은 격한 이념 경쟁의 시대였다. 실용주의와 연결된 상대주의·다원주의·관용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죽느냐 사느냐’의 시대였다.
냉전의 종식과 중국의 개혁·개방은 실용주의의 부활을 예고했다. 냉전시대 중국은 실용주의를 ‘미국이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로 전환한 데 따른 철학적 결과물’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정신은 실용주의다. ‘흑묘백묘(黑猫白猫·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말은 중국식 실용주의를 요약한다.
제임스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 중에서 오늘의 세계에서 생명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실용주의만이 아니다. 제임스는 미국에서 최초로 심리학을 가르쳤다. 심리학 분야 주저인 1200쪽 분량의
인간 삶 바꾸는 모든 종교는 참
다문화·다종교시대가 개막함에 따라 종교 체험에 대한 제임스의 연구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제임스는 “모든 믿음은 현금 가치(cash value)가 있어야 참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주장을 종교 영역에도 적용했다. 제임스는 합리주의·경험주의 논쟁에 무관심했던 것처럼 종교를 다루는 기존의 방법론도 무시했다. 다윈의 영향으로 제임스는 기독교의 신관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신(神)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에게 쓸모없는 일이었다. 제임스는 신학·교리·제도가 아니라 개인, 특히 보통 사람들의 종교 체험에 관심을 가졌다. 제임스가 주목한 것은 어떤 종교적인 믿음이 삶을 변화시키는 데 유용한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현실에서 잘 작동하면 어떤 믿음이라도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임스가 이룩한 불멸의 업적 이면에는 굴곡 있는 삶이 있었다. 많은 다른 위인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30대까지는 방황했다. 아버지의 변덕도 한몫했다. 철학의 길로 매진하게 되기 전에는 화가가 되려다 포기하기도 하고 하버드대에서는 해부학·생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다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에 제임스는 13세 때부터 유럽 각지에서 공부하거나 체류할 수 있었다. 아버지 헨리 제임스는 스웨덴의 철학자·신비주의자·신학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1688~1772)에게 매료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임스도 평생 초자연·심령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실험정신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실험 도중 화재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부상을 입었다. 제임스는 아편을 피우고 그 느낌을 일기에 기록했으며 아산화질소를 흡입하기도 했다. 아산화질소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다. 제임스는 아산화질소를 흡입한 상태에서야 헤겔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